남성 패션에 엣지 바람이 거세다. 옷 잘 입는 것을 능력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은 물론, 삼성그룹 같은 보수적 조직 문화를 지닌 기업조차 비즈니스캐주얼 근무가 일상화하면서 엣지(edgeㆍ예민한 패션 감각)는 남성들이 갖춰야 할 여러 덕목 중 하나로 급부상하는 추세. 올 가을 남성복업체들이 유난히 엣지를 강조하는 이유다.
예민한 후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난 여름 유난히 조끼에 페도라(챙이 좁고 브림 중앙이 살짝 들어간 모자) 차림의 남성이 많았고 한때의 유행으로 치부됐던 스키니 바지가 남성 패션의 대세로 정착한 것에 주목했을 터. 여성스러움과 세련된 멋이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초식남(여린 감성을 가진 남성들) 스타일로 통칭되는 이 패션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정통 신사복이나 캐주얼의 단조로움을 피해 양쪽의 아이템들을 절묘하게 섞음으로써 엣지가 살아 있는 클래식, 현대적으로 변용된 클래식의 멋스러움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최혜경 LG패션 마에스트로 디자인실장은 "가을 남성복은 비즈니스캐주얼의 큰 흐름 속에서도 고전의 멋스러움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며 "여름철 이미 초식남 트렌드를 타고 성공적으로 등장한 1960,70년대 복고풍 아이템들, 즉 페도라 숄 보타이 등 클래식 소품들을 비즈니스캐주얼과 적절하게 매치시키는 것이 중요 이슈"라고 전망했다.
국내 남성복 3대 업체인 제일모직 LG패션 코오롱패션 등이 모두 이런 스타일을 올 가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LG패션은 비즈니스캐주얼을 중심으로 '엣지 클래식'을 화두로 잡았고, 코오롱패션은 '모던 클래식', 제일모직은 정통 슈트의 부활을 선언하며 '댄디 스타일'을 슬로건으로 내놓고 있다.
정장과 캐주얼의 영역 구분이 모호해지는 추세에 맞춰 정장은 더 과시적으로, 캐주얼은 더 세련되게(혹은 정장스럽게) 연출하는 것이 이들 업체가 내놓은 가을 스타일링의 제1원칙이다.
가을 남성복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층 깊어진 색감이다. 김나라 제일모직 로가디스 디자인실장은 "전형적인 검정이나 짙은 회색 대신 자주빛이 가미된 감색, 카멜의 깔린 다소 탁한 느낌의 갈색 등으로 색감이 깊고 풍부해진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비즈니스 캐주얼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체크와 면 소재가 다채롭게 활용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줄무늬가 쇠퇴한 대신, 영국 신사의 멋이 강조되는 글렌체크가 많이 등장했고 카디건이나 니트 베스트 등 소품에는 아가일체크도 적극 사용된다.
울이나 실크 일색의 정장에 면 소재가 대거 등장한 것도 흥미롭다. 톡톡한 질감의 면 소재는 캐주얼한 멋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하의를 따로 입는 콤비 아이템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 아이템으로 젊은 층들에게 특히 인기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남성 패션에서 여성스러움이 강조되는 추세에 따라 패턴에도 여성 패션의 덕목들이 많이 첨가됐다. 어깨 패드는 한결 얄팍하고 작아졌으며 상체에 꼭 맞게 디자인된 패턴은 허리선을 잘록하게 표현해 전체적으로 날렵한 인상을 강조해 준다.
무엇보다 한때 여성용 아이템으로 치부됐거나 너무 멋을 낸다는 이미지가 강해 기피 대상이었던 아이템들이 인기를 끌 전망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페도라, 색감이 풍부한 파시미나 숄, 보타이, 카디건 등이 있다.
이미 여름 내내 밀짚 소재에 리본을 두른 형태의 페도라가 선풍적 인기를 모았는데 가을엔 소재가 펠트나 울로 바뀌어 다시 남성들을 유혹한다. 페도라는 챙이 2~3cm 정도로 좁은 것이 일반적인데 캐주얼한 차림에는 크라운(모자의 봉긋한 부분)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티롤리안 스타일이, 정장에는 크라운이 원통형으로 된 소프트햇이 더 어울린다.
보타이는 파티용으로나 흔히 사용됐지만 올해는 일반적인 캐주얼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품. 노타이 패션이 일반화한 반면, 보타이는 타이라기보다는 깜찍한 액세서리로서 남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멋스러운 스타일 연출을 위해서는 정직한 코디를 피하는 것이 관건이다. 변선애 코오롱패션 지오투 디자인실장은 "고전과 현대, 정장과 캐주얼이 절묘하게 믹스된 상태여야만 유모어가 살아 있는 세련된 옷차림이 된다"며 "댄디한 차림이라도 정장에 같은 원단으로 된 조끼를 곁들이는 정직한 차림보다는 자주나 보라색의 스웨터 혹은 니트조끼를 정장에 곁들여 입는 것이 훨씬 멋스럽다"고 귀띔했다.
★초식남(草食男)이 뭐지?
첫 등장은 2006년 일본의 칼럼니스트 후카사와 마키가 갈수록 연성화하는 일본 신세대 남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실제 채식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라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부류를 '육식남'이라고 보고 그 반대편에 있는 여린 감성의 남성들을 지칭한다. 2000년대 들어 알파걸 신드롬의 확산 속에 '강한 남자, 약한 여자'라는 20세기적 성 구별이 붕괴되면서 강한 여성의 부상에 주눅 들어 투쟁 대신 자기만의 堧막?들어가 초연한 삶을 추구하는 부류.
독신남이 대부분인 이들의 생활 방식은 만화 패션잡지 게임 등 혼자 즐길 수 있는 문화에 능통하며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것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역시 외모를 가꾸는데 몰입하는 그루밍족의 경우 치장은 경쟁력을 높이는 성공 수단, 즉 드레스 투 석세스(dress to success)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초식남의 치장은 자기애를 만족시키는 자족적 행위에 그친다는 점이다. 서로 물고 뜯는 정글의 법칙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초식성의 이미지는 강화된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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