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터미널'(2004년). 크라코지아라는 동유럽의 한 국가에서 뉴욕 JFK공항에 도착한 이방인(톰 행크스)이 공항 직원에 여권을 내미는 순간, 입국이 거절된다. 크라코지아가 쿠데타로 인해 국가 자체가 사라진 것. 9개월 동안 꼼짝없이 공항에서 살아가던 그는 내전이 끝나자 공항 문을 나서 어디론가 향한다.
뉴욕에 온 유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영화는 한 재즈 카페를 찾은 그가 숨진 아버지가 살아 생전 유일하게 사인을 받지 못한 유명 재즈 아티스트의 사인 한 장을 받아 손에 쥐고는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마무리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의 사인을 그토록 받고 싶어 머나먼 이국 땅에 온 것일까. 영화 속 카메오로 깜짝 등장한 이, 바로 '재즈의 전설'로 불리는 베니 골슨(81)이다.
주옥같은 재즈 명곡의 작곡자이자 테너 색소폰 연주자인 그를 21일 뉴욕이 아닌, 서울에서 만났다. 영화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는 "스필버그 감독이 대학생이던 시절 내 사인을 굉장히 받고 싶어했다"며 뜻밖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영화처럼 전 세계 수많은 재즈 팬들이 사인을 요청할 텐데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그는 지체 없었다. "내 공연을 보기 위해 돈을 내고 재즈를 듣기 위해 CD를 사주는 고마운 사람들인데 당연히 사인을 다 해줘야 한다. 그게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1929년 미국에서 태어나 1956년 '디지 길레스피' 밴드의 멤버가 된 그는 2년 후 '재즈 메신저'의 멤버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재즈의 매력에 빠져 든다.
베니 골슨은 'Jazz Portrait'(사진작가 아트 케인이 1958년 뉴욕의 한 허름한 건물 야외 계단에서 20세기를 빛낸 유명 재즈 뮤지션을 모아 촬영한 역사적인 사진)라는 한 장의 사진에 담긴 57명의 재즈 뮤지션 중 유일한 생존자다.
펑키한 분위기에서도 세련되고 부드러운 맛을 자아내는 편곡, 감칠 맛 나는 음색을 만들어내는 그의 색소폰 연주는 '골슨 하모니'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재즈 좀 들었다 싶은 음악 팬이라면 웬만해선 그를 모를 리 없다는 얘기다.
최근 막을 내린 제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참석차 8년 만에 두번째로 방한한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판타스틱"이라는 표현을 4번 이상 써 가면서 말이다.
"제천 호반에서의 공연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처음 왔을 땐 공연만 하다 돌아가 많이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다시 찾은 한국은 뉴욕으로 착각할 정도로 굉장히 발전한 것 같아 놀랐다. 열광적인 한국 팬들이 보고 싶어서라도 꼭 다시 오고 싶다." 그는 이번 JIMFF에서 대표 곡 'Whisper Not' 'Along Came Betty' 등 7곡을 선사하며 제천에 모인 재즈 팬들을 열광케 했다.
평생을 함께 해온 재즈와 색소폰, 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재즈는 내 몸에 흐르는 피와 같다"고 했고 "색소폰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짧지만 분명했다.
요즘 재즈에 비해 댄스 음악 등이 넘쳐난다고 물었다. "재즈든 댄스든 헤비메탈이든 장르는 다르지만 모든 음악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재즈를 사랑하는 한국 팬들이 있어 이번 공연이 너무 즐거웠다."
여든이 넘은 고령임에도 재즈 이야기만 하면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에 미소를 짓는 베니 골슨. 여전히 왕성한 작곡활동과 전 세계 공연 등을 통해 삶의 이유를 찾고 있는 그는 이날 'EBS스페이스 공감'의 녹화를 마친 뒤 25일 다음 공연장인 태국으로 향했다. 지금쯤, 태국의 수많은 팬들도 그의 아름다운 재즈 선율에 흠뻑 취해 있으리라.
김종한 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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