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외환위기 때는 재벌이 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대대적인 개혁에 시달렸다. 이번 경제위기에서는 재벌의 기를 살려 위기를 극복해 보자는 정반대의 접근으로 재벌의 콧대가 아주 높아졌다. 그들의 소원대로 출자총액 제한을 폐지해 주면서 투자를 늘려 달라고 정부가 사정하는 형국이다. 금산분리 정책도 무장해제되어 사금고화 우려에 가로 막혔던 은행업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새 미디어법에 따라 미디어 분야의 문도 열렸다.
고삐 풀린 재벌의 위험
이제 재벌은 과거의 제약에서 거의 해방돼 얼마든지 날개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였다. 그런 만큼 한국경제는 더욱 더 재벌들이 하기에 달렸다. 이런 변화가 재벌에 반드시 유리한 것 일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올가미로 작용할 수도 있다. 힘이 커지면 남용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따른 책임과 벌칙이 오히려 더 가혹해질 수 있다. 따라서 강력해진 재벌의 힘이 남용되는 것을 예방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재벌을 보호할 수 있고 국가도 보호할 수 있다.
한국경제는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이다. 이런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지배하는 별도의 힘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별개의 세력이 존재하면 그 시장에는 더 이상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성립할 수 없다. 자유공정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 시장은 건강한 시장경제를 창달해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재벌이다.
정부는 언제든지 시장을 좌우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론적으로는 시장실패의 경우에만 정부개입을 정당화한다. .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부의 실패를 항상 우려하고 있다. 정부의 개입은 문제를 교정하기 보다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시장실패가 있더라도 시장 그 자체가 정부개입보다 덜 해롭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재벌도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시장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만약 이런 재벌의 힘이 남용된다면 시장경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국가경제는 허울만 시장경제일 뿐 내용은 재벌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 이런 재벌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정부뿐이다. 시장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시장 내의 힘 있는 특정세력이 시장을 왜곡시키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정부가 간여하면 정부실패가 우려된다. 이것이 시장경제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만든 별도의 정부기구가 공정거래위원회이다.
공정위는 시장의 틀을 만들고, 그 틀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은 시장 전담 정부기구이다. 이러한 정부기구는 경제이론적으로도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선진국이 될수록 점점 더 강한 힘을 갖는 정부기구이다. 말하자면 공정위는 시장경제의 파수꾼이다. 이런 역할과 위상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공정위에 재벌규제 기능까지 맡기고 있다. 재벌이 존재하지 않는 선진국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추가적인 공정위의 기능이다.
공정위 역할 한층 중요
그런데 재벌의 힘이 너무 커져서 공정위와 맞장을 뜨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재벌은 금력은 물론, 우수 인력과 언론까지 장악하여 여론과 정치권력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자유 공정경쟁이 지켜질지 아주 우려되는 바이다. 그래도 기대되는 곳은 공정위이다. 공정위가 그 기능을 잘 수행해 주면 시장경제는 번영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위가 재벌의 힘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재벌의 시장지배력과 경제지배력의 남용을 막아낼 수 있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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