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반도가 북한의 대화 공세로 달아오르고 있다. 북한은 최근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평양으로 초청하고, 조문단을 서울에 보내 북미 및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은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논의하기 위해 26일부터 사흘 동안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적십자회담에도 응하기로 했다. 7월까지 계속되던 대미, 대남 강공 분위기는 사그라진 대신 미국과 남한을 향해 적극적으로 대화를 희망하고 나선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왜 '통미통남(通美通南)' 전술을 택한 걸까.
북한은 지난해 10월 이후 얼마 전까지 잇따라 강경 일변도의 카드를 내놓았다. 12ㆍ1 조치로 남북 육로 통행을 제한하고, 당국간 통신 채널도 단절했다. 이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남북 군사충돌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또 4월에는 장거리 로켓 발사를, 5월에는 2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하지만 7월4일 미사일 7기 발사 이후에는 확연히 온건해진 모습이다.
8월 들어서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4일)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10일)을 평양으로 불러 대외관계 개선 움직임을 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서울에 왔던 김기남 노동당 비서 일행이 체면 손상을 무릅쓰고 청와대 면담을 희망, 23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남북대화 재개 의사를 전한 장면은 결정적이었다.
북한 입장을 대변해온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25일 "조선반도(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크게 전환돼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 동안 이 대통령에게 붙이던 '역도' '역적패당' 등의 험한 말도 이날부터 북한 방송에서 사라졌다.
북한의 변화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 북한의 강공 배경에는 지난해 8월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사건이 있었다. 1인 지배 체제인 북한은 후계구도 구축에 주력해야 했다. 그래서 핵실험, 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핵개발 선언 등 강경 카드를 몽땅 쓸 수밖에 없었다. "건강을 회복한 김 위원장이 이제는 나름의 억지력을 확보했다는 판단 속에 2012년 강성대국 건설 목표에 맞춰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남북관계 복원에 나선 것"(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지난해부터 남쪽의 식량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 미국의 식량 50만톤 지원마저 중간에 거부해 식량난에 처했다. 4월부터 계속된 '150일 전투'에도 불구하고 경제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기미는 없었다. 핵실험 응징 차원에서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1874호 대북 제재로 중국을 제외하곤 외부와의 거래가 사실상 막혔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은 미국,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남한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조문단을 보내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북관계가 막히면 북미ㆍ북일 관계도 제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는 얘기다.
때마침 미국이 제재 국면에도 대화를 병행하겠다는 '투 트랙(two-track)' 원칙을 내놓고 '포괄적 패키지'라는 당근도 제시했다. 물론 "북한이 아직 핵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면 그들의 진의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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