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가에는 "대주주가 자사주를 매입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라"는 오랜 증시 격언이 전해져 내려온다. 기업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대주주가 자신의 기업 주식을 산다는 것은 그 만큼 주식이 오를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국내 대표 은행 지주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이 같은 월가의 증시 격언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보여줬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글로벌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지난해 하반기에 자사주를 대거 매입한 4대 은행 지주사들의 최고경영자(CEO)들이 10개월 만에 대박에 가까운 수익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던 지난해 말 이들이 앞다퉈 자사주를 매입할 때만 해도 시장에서는'주가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평가절하는 분위기였다.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전이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금융주 매입 자체가 무모한 투자로 받아들여졌던 것. 하지만 금융지주사들을 이끌고 있는 수장들은 "현재 위기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위해 과감하게 자사주 매입에 나섰고, 적어도 현재까지는 성공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자사주 대박' CEO다. 전문경영인이면서도 신한지주의 실질적 오너로 평가 받는 라 회장은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신한지주 주가가 급락하자 8억원의 사재를 들여 자사주를 매입했다. 25일 현재 주가는 4만2,500원까지 올라 자사주로만 2억4,000만원 이상의 평가차익을 거뒀다. 더욱이 올해 3월에는 신한지주가 자본확충을 위해 실시한 유상증자(발행가 1만6,800원ㆍ2만6000여주)에 참여해 6억5,000만원의 평가차익까지 얻었다. 비록 장부상 이익이기는 하지만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에 과감한 투자로 9억원에 가까운 수익을 낸 셈이다.
수익률만 놓고 따지면 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가장 돋보인다. 지난해 10월 우리금융의 주가가 급락하자 이 회장은 3차례에 걸쳐 1만3,000주를 매입했다. 평균단가는 약 6,300원선. 하지만 지난해 4분기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우리금융이 올해 들어 흑자기조를 이어가자 주가는 1만4,500원(25일 기준)까지 치솟았다. 전체 평가 이익은 1억원 정도지만 수익률이 무려 130%에 달한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도 지난해 10월 말 일주일간 5,000주(평균단가 2만1,000원)를 분할 매수해 25일 현재(3만4,600원)까지 64%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증시가 패닉상태에 빠지자 "이제는 주식을 사야 할 때"라고 말하며 주목을 받은 황영기 KB금융그룹 회장도 2,900주(3만5,500원)를 사들여 현재 50%가 넘는 수익을 거둔 상태다.
우리금융그룹 관계자는 "최고 경영자들의 자사주 매입은 개인 자산을 늘리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 경영위기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며 "자사주 수익률 자체보다 최고 경영자들이 위기 극복을 위해 그만큼 노력을 많이 했다는 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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