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편히 잠들었다. 고인의 쉼터는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 사이에 자리 잡았다. 묘역의 높이와 크기는 다르지만 앞선 두 대통령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밖에 어떤 수사도 그 상징성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곳 국가원수 묘역에 빈 자리가 없다니 더욱 그렇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은 건국 61년 헌정사의 절반을 차지한다. DJ는 역사의 물줄기를 굽어보는 곳에서 이들과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기꺼워할 듯하다. 격동의 세월을 조용히 지켜본 두 전직 대통령도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더불어 논할 만한 새 이웃, 아니 새 식구를 반길 것이다.
역사의 거인 반열에 오른 DJ
현대사에 우뚝한 거인들의 말없는 대화 내용을 감히 짐작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보다 그들의 유산을 놓고 어떻게 역사와 대화할지 올바로 가늠하는 것이 이승에 남은 이들의 몫이 아닐까. DJ 영전에서 용서와 화해, 화합의 정신을 한껏 우러른 사회가 진정으로 고상한 뜻을 받들 채비를 갖췄는지 솔직히 의문이기에, 거인들의 삶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기억은 초등학교에서 '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 찬가를 배운 것으로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4ㆍ19로 물러난 뒤 하와이로 망명했고, 이어 1965년 장례 행렬 옆에 소복차림 할머니들이 주저앉아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자유당 독재와 부정부패, 이기붕과 이강석 등에 관한 갖가지 희한한 이야기를 읽은 뒤에도 고인에게 경이로움과 동정을 느꼈다.
그 무렵 김구 여운형 암살 등 해방공간의 혼돈과 친일파 득세, 미국의 역할 등에 관한 글을 읽을 때면 적잖이 비분강개했다. 역사와 국제정치를 제대로 배운 뒤의 분별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수다한 논쟁을 지켜본 지금, 현충원 홈페이지의 소개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항일 외교투쟁과 정부수립, 반공체제 확립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는 글의 서툰 문장이 거슬릴 뿐이다.
박 대통령의 추억은 한결 가깝다. 어린 시절의 맹목적 추앙과 유신헌법 교과서의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엇갈린다. 거듭된 대학 휴교령의 기억과, 군 복무시절 그와 미국의 갈등에 애국적 울분을 느낀 경험이 겹친다. 참혹한 죽음에 비감(悲感)을 느꼈으나 유신체제와 작별한 언론을 새로 직업으로 택한 것을 모순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뒤 30년이 지나도록 박 대통령 규탄과 매도에 집착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 진정성을 선뜻 인정할 수 없다. 무덤 속의 고인을 때없이 정치적 논쟁거리로 삼는 것은 현실의 과업을 외면한 채 역사를 이기적 투쟁 방편으로 여기는 위선이라 생각한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민족중흥의 위업을 이룩하였다"는 현충원의 소개가 낡은 어법이라고 시비할 일도 아니다.
DJ는 애초 부정적 이미지로 다가왔다. 동교동과 철길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그의 고난을 목격할 때나 정계 은퇴 후 독일에서 만났을 때 경외(敬畏)와 인간적 매력을 느꼈으나 지지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대권에 도전했을 때, 호남의 한(恨)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DJ 대통령'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해 공연히 주변의 눈총을 받았다. 그 뒤 그의 민족화해 노력을 앞장서서 옹호했다.
우리 자신의 진실성이 관건
지금도 DJ를 마음 깊이 추앙하지는 않는다. 어릴 적 지겹도록 들은 부정적 평가 탓이 크겠지만, 그보다 맑지 않은 정치 행태와 사사로운 욕심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높이 기리는 세상을 나무라지 않는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듯 DJ는 우리 스스로 쌓아올린 역사이기 때문이다.
세 거인을 동작동 언덕에 나란히 모신 것으로 우리 사회는 갈등과 대립에 치우친 역사에 상징적 균형을 이룩했다고 본다. 그 심정적 균형이 다시 어디로 기울지는 우리 모두의 진실성에 달렸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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