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서울상대는 경제학과와 상학과(오늘의 경영대학)가 있었는데 신입생은 각각 반반씩 350명을 뽑았으며 무역학과는 나중에 생겼다. 과는 나누어 있었지만 수업은 모든 학생들이 같이 들었고, 다만 선택과목에서만 서로 갈렸기 때문에 과의 구분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 뒤 서구학제를 따라 경영학과가 분리되어 경영대학이 됐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급생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은 졸업하고 나서 실감했다. 정원이 30명 또는 40명인 작은 학과는 졸업 후 모임에 성원을 걱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등산이든 바둑이든 해외여행이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젊어서는 사회활동에 상부상조하는 힘이 되어 좋고, 나이 들어서는 서로 벗이 되어 외로움을 덜어주니 좋다.
우리 동기 중에는 농수산부 조경식 상공부 이봉서 등 국무위원을 지낸 사람도 있고, 신복영 이철수 우찬목 안승철 김승경 민형근 등 은행장 8명, 그리고 최수일 유충식 홍관의 배주원 이두석 등 대기업 사장만도 수십 명을 배출했다. 지금도 1955년에 입학한 13회 동기회는 서울에 마련한 사무실에 늘 많은 사람이 모여 교류하고 있다.
서울상대의 그 때 교수진은 정말 화려했다. 경제학에서는 최호진 최문환 고승제 김준보 홍 우 박희범 박동묘 성창환 교수 등이었으며, 경영학에서는 이상훈 권오익 이해동 교수가 있었다. 변형윤 교수와 이현재 교수는 전임강사로 오셔서 나는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었다. 대부분 작고하셨지만 가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학 들이었다.
이 때 대학교수들은 월급으로 생활이 안 돼 이 대학 저 대학의 강사로 다녀야 하는 때였다. 그래서 당시 최호진 교수는 중앙대 교수로서, 그리고 김준보 교수와 성창환 교수는 고려대 교수로서 서울상대에 강사로 나와 우리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대학 강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교수들은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 일찍 마치는 경우가 많았고 휴강도 자주 있었다. 낡은 노트로 부실한 강의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노트를 읽어 주고 그것을 필기하도록 하기도 했다. 한 학기를 배운 것이 노트 절반을 채우기가 어려운 때도 있었고 학기가 끝나고 나서 무엇을 배웠는지 하는 의문을 가질 때도 있었다.
강의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박희범 교수의 경제계획론과 최문환 교수의 경제사상사였다. 박희범 교수(그 후 충남대 총장)는 당시 허어쉬만(A.O.Hirshman)의 불균형 성장론 등 당시 경제발전의 첨단적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짜임새 있고 열정적인 강의를 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최문환 교수(그 후 서울대 총장)는 경제사상의 흐름을 명쾌하게 강의해서 인기가 높았는데 강의에 열이 오르면 학생들을 보지 않고 벽을 보고 강의 하는 버릇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호진 교수는 높은 명성에 우렁찬 목소리가 무게를 더 했고, 고승제 교수는 똑 바른 자세로 늘 엄숙하게 강연하듯 하는 열강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피부색이 태생적으로 검은 편이어서 동급생 가운데 얼굴 검은 세 사람의 하나로 꼽혀 지금도 놀림을 받는다. 그런데 검은 피부가 햇볕에는 더 예민하게 그을려서 한 여름에 잠시만 햇볕에 노출되어도 검게 타버린다.
그래서 농촌에 내려가 일하다 올라오면 얼굴이 너무 검어 친구들에게 다소 창피함을 느낀 일도 있었고 해수욕을 다녀왔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어넘기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은 활기찬 것이었고 희망찬 것이었다. 등록만 해 놓고 농사를 지으러 농촌에 내려갈 때 나는 도서실에서 많은 책을 빌려갔다.
여기에는 스미스(A. Smith)의 국부론, 리카르도(D. Ricardo)의 정치경제학, 맬더스(T.R. Malthus)의 인구론, 마르크스(K. Marx)의 자본론, 케인즈(J.M. Keynes)의 일반이론 등 원전과, 후진국개발문제를 다룬 허어쉬만의 경제개발전략, 넉시(R. Nurkse)의 후진국 자본축적론, 그리고 킨들버거(C.P.Kindleberger)의 경제발전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러한 책들을 열독하고 이것을 노트하였다. 그래서 비록 강의 출석률은 나쁘고 학교성적은 겨우 중위권을 넘었지만 학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3학년 1학기 때인 57년 5월에는 1년 선배였던 박준상 오정현 전재희씨 등과 함께 박동묘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여 농업경제연구회를 창립하고 여러 차례 세미나를 가졌는데 박준상 선배가 회장 그리고 내가 부회장을 맡았다.
이 세미나에는 당시 농업경제계를 대표하던 주석균 농업문제 연구소장, 최응상 농촌진흥청장, 김주인 농협 상무(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유시동 농협 조사부장, 최주철 교수 와 박동묘 교수가 단골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대학 내에 경제연구회가 있어 우리 동기 중 수석입학자인 신복영(후에 한은 부총재 및 서울은행장)이 회장을 맡고 나는 총무를 맡아 함께 일했다.
이 때 학교에서는 '상대평론'이라는 논문집을 매년 발간하고 있었는데 나는 두 차례에 걸쳐 한 번은 개발정책의 방향에 대해, 한 번은 불균형 성장론에 대해 발표 한 일이 있으며 3학년 때부터는 대학 학술대회나 세미나에 대학을 대표해서 발표자 또는 사회자로 참여하였다.
그 무렵 서울상대 졸업생인 한국은행의 송인상 부총재가 대학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였다. 훤칠한 키의 미남형인 송 부총재는 해박한 지식 에 능숙한 말솜씨로 IMF 총회를 다녀온 귀국보고를 하였는데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후진들에게 명사의 강의는 매우 중요한 자각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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