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체면’을 매우 중시한다. 고위급 인사들로 구성된 북한 특사 조문단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남한 체류 일정을 하루 연장한 것은 별로 체면이 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조문단이 체류 연장을 하면서까지 이 대통령 면담을 성사시킨 데서 남북관계를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북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연일 ‘평화 공세’를 펴는 북한의 목적이 순수한 남북관계 개선인지에 대해선 현재로선 회의적 시각이 많다. 북한의 태도 변화가 워낙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북한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사시 핵 보복의 불소나기가 남조선에도 들씌워지게 될 것”(6월25일 노동신문), “정전 협정의 구속을 받지 않겠다”(5월27일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등 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북한의 목표인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환경 조성용”,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압박 무마용”,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수정 압박용” 등 북한의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북한이 대미, 대남 압박 카드를 거의 다 써버린 이후 불가피한 전술 변경이라는 시각도 있다.
북한의 진정성이 확인되지 않는 한 일방적 구애에는 호응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최근 북한의 잇단 유화 제스처에 대한 정부의 반응에선 ‘환영’이나 ‘반색’의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의 노림수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정부가 22일 이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북한 조문단의 깜짝 요구에 대해 이리저리 재면서 시간을 끈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한미관계와 북미관계, 북핵 문제 진전 여부 등 고려할 사항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북한의 손을 덥석 잡지 않는 것은 앞으로 남북대화가 본격 재개될 경우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기싸움의 성격도 있다.
하지만 ‘조건 없는 남북 대화’를 주장해 온 정부가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말을 바꾼 셈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 대통령은 얼마 전 8ㆍ15 경축사에서 “언제든 어느 조건에서든 남북간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었다.
동국대 북한학과 김용현 교수는 “북한의 평화 공세에 정부가 어느 정도 호흡 조절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정부가 모든 것을 세밀하게 계산한 뒤 행동을 하려 하면 오히려 실기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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