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전태일의 삶과 사랑, 투쟁과 희생을 들으면서 '이 사람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겠구나! 전태일의 뜻이 꼭 이루어지게 해야겠구나!'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걱정도 됐다. 무엇보다 11월 중순을 넘어 방학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다만 학생운동세력이 전국적으로 연결돼 있었고, 특히 서울법대는 방학 때도 상당수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고 있어 그나마 걱정이 덜 됐다.
이소선 어머니는 두 시간 넘게 열변을 토하시고는 그제야 영안실로 가보자고 했다. 영안실에는 동네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함께 간 문경용도 아무도 없어 보이더라고 했다. 그래서 영안실로 갔다. 동네사람 7, 8명이 나무의자에 앉거나 서성거릴 뿐이었다. 서울 중심가의 큰 병원 영안실인데도 아주 초라했다.
반쯤 지하에 10평 정도 되는 방에 나무의자 서너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오버코트를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코트의 털이 다 빠져 마대푸대 같았다. 한마디로 가난이 철철 흘렀다. 우리를 친절히 맞아주면서 동네서 끓여온 팥죽이라며 한 그릇씩 떠 주어 맛있게 먹고는 곧바로 나왔다.
학교에 가서 몇몇 학생들을 만나 '전태일 분신사건'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는 조영래를 만나러 갔다. 조영래는 사법시험 공부 중에도 나와 이따금씩 만났는데 마침 그날도 만날 약속이 있었다. 조영래는 이소선 어머니의 말을 듣거나 영안실에 가보지 않고도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에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사법시험 공부를 중단하고 보름 넘게 '전태일 투쟁'에 전념했다. 조영래는 전태일 투쟁을 국민 각계로 확신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미 삼선개헌 반대투쟁 등을 주도해 온 데다 언론계, 종교계, 학계 등에 많은 인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밤 학교 앞 하숙집을 찾아다니며 다음날 학생총회를 열 수 있도록 준비했다. 서울법대는 작은 학교이고 학생총회나 성토대회에 빠지는 학생이 거의 없는 데다, 특히 사회법학회와 농촌법학회 회원들은 형제같이 지내 일이 쉽게 진행되었다.
주도자가 따로 있을 것도 없었다. 이신범, 조희부, 이광택, 채만수, 이인제, 최규성, 최회원, 장성규, 원정연 등과 밤늦게까지 학생총회에서 결의할 사항을 논의하면서 학생들의 등교를 독려했다.
다음날인 11월 16일 서울법대에서는 오전 10시에 학생총회를 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태일 사건을 사회문제화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00여명의 학생이 모여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전태일의 장례식을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치를 것을 결의했다. 그러고는 30여명의 학생이 성모병원 영안실로 몰려갔다. 마침내 영안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때부터 세상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학생들이 나섰다. 서울상대, 서울문리대를 비롯해서 고대, 연대, 이대, 성대, 한국외대 등 그 동안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대학들에서는 비록 학기말인데도 '전태일 투쟁'에 적극 나섰다.
특히 서울상대에서는 400명이 넘는 학생이 모여 박정희 정권의 반노동자적 경제개발정책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단식투쟁까지 전개했는데, 김근태, 김승호, 김대환 등 탁월한 운동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KSCF, 새문안교회 등 기독교단체가 전태일의 뜻을 구현하는 일에 적극 나섰는데, 오재식, 권호경, 김동완, 서경석 등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특히 김재준, 박형규 등 원로목사들이 적극 나선 가운데 수많은 교회에서 전태일의 뜻 구현을 위한 기도회가 열려 전태일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언론이 전태일 사건을 적극 보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일보의 이상현기자가 전태일 가족에게 접근하여 일기장을 입수해 주간조선에 중요 부분을 보도해서 전태일의 진면목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일기장 10여 페이지가 찢겨나가 그 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전태일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가 됐고, 특히 지식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정치권은 이 사건을 정치쟁점화 했다. 전태일 사건이 얼마나 큰 국민적 관심사가 됐는지는 전태일 동지 빈소에 진열된 조화가 말해줬다.
문상객 한 명 제대로 없던 빈소에 조화가 밀려들기 시작해 수 백개가 넘었다. 사회단체와 정당 대표들은 물론 김대중, 김영삼 등 중요 정치인과 심지어 국무총리까지 조화를 보내온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영안실로 가는 길 양쪽에 조화가 꽉 들어찼는데, 전태일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름 없는 노동자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결국 전태일의 죽음은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무엇이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이 국민적 영웅을 낳고,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과제를 던질 수 있었을까?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의 헌신적 사랑 때문일까? '조국 근대화'의 음지에서 신음하는 노동자의 참상을 폭로한 그의 치열한 투쟁 때문일까?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참혹하게 죽어간 그의 분신자결 때문일까?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감동은 지독한 가난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난과 시련을 겪었으면서도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은 전태일의 삶이 그려낸 아름다운 희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다 마침내 그들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을 우리 모두에게 남기고 자신의 몸을 불태운 그 고결한 인품과 숭고한 희생정신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은 뜨거운 향학열에도 불구하고 학교공부라고는 초등학교 4년, 중학과정 1년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그 어떤 철학자나 사상가도 도달키 어려운 밝은 지혜, 높은 사상, 아름다운 꿈, 치열한 사명감을 지녀 성자의 모습 그대로였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