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미국에 머물다가 한국에 돌아온 1994년은 남북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미군 기지에서는 자국민 대피 및 철수 훈련을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우리 국민의 생필품 사재기와 방독면 구입 등이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다. 괜히 돌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들은 한국전쟁의 참상과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얼마나 강렬하게 머리 속에 박혔던지 보따리 꾸려 피난 가는 꿈을 꾼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고무줄 놀이 때 즐겨 부르던 노래의 하나도 "무찌르자 공산당…"이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부 표피 아래 숨어있던 공포감이 진물처럼 올라왔다.
전쟁 공포 해소한 공적
북한이 미사일을 쏴대던 몇 달 전, 젊은 세대들은 전쟁 가능성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이번에는 나의 공포감도 크게 요동 치지 않았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한 공동으로 운동경기에도 참가하고, 북한에 우리 기업들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고, 잘 나가는 우리나라를 우방이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가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공(功)과 과(過)가 다 있으련만, 나의 전쟁 공포감 감소에 기여한 바는 큰 것 같다. 전쟁 불안감 감소가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불감증, 분단 국민이 가져야 할 정신력의 나태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한을 경계의 대상이기보다는 잘 알아야 할 상대로, 무찔러야 할 적이기보다는 더불어 잘 살아야 하는 동반자로 생각하게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과거나 현재나 모든 나라는 자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이런 노력은 국가와 정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얽혀있다. 따라서 순수하게 평화를 위한 행동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는 짧은 시간에도 큰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반면 민간 차원에서는 순수성을 보존하기는 쉽지만 많은 역경과 세월이 담보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사회복지사 제인 아담스는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 앞서 미국이 승리만을 좇을 것이 아니라 국제기구 창설을 통해 하루 빨리 평화를 논의해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참전 대세 속에 비애국적 인사로 지탄 받았다. 전쟁 뒤 패전국의 무고한 희생자인 아동들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을 때는 친독 반역자로 매도됐다.
평화주의자이며 중립을 지키려 한 그가 무정부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수감된 노동자들을 변호한 연설은 그에게 공산당 지지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주었다. 정치적 불안과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격렬하던 1910년대 말,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 여러 국가를 방문하며 평화와 인간성 회복, 그리고 이를 위한 여성의 역할을 역설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미 국민은 평화를 생각하게 되고 아담스를 다시 존경할 만한 인물로 보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자 평화주의적 해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는 평화가 가장 절실할 때 자신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국제적 관심사로 만들었습니다… 이해 관계때문에 평화가 가려진 어려운 시기에도 자신의 이상에 충실했습니다." 1931년 노벨평화상 수상식장에서 71세의 수상자 제인 아담스를 소개한 말이다.
평화 노력 오래 기억 될 것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민주화와 남북관계 개선 공적 등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햇볕정책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지원했다는 비판도 거세지만, 공정한 평가는 역사가 내릴 몫이다. 하지만 많은 오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점, 남북화해와 민족화합을 위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결단력, 국민에게 평화적 통일 희망을 갖게 한 점 등은 노벨상과 함께 오래 기억 될 것이다.
홍순혜 서울여대 사회복지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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