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재발 방지라는 거창한 목적으로 출발한 금융감독체계 개편 및 한국은행법 개정 논의가 용두사미로 흐르고 있다. 한은법 개정은 국회와 정부, 한은 간의 뚜렷한 의견차이로 공전을 거듭하고 있고 감독기구 개편 논의는 사실상 '없던 일'이 됐다.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감독체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정작 한국만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마저 고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감독기구 개편논의 실종
금융감독기구 개편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금융감독과 금융정책, 국내금융와 해외금융 담당이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으로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 효율적이고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는 지적이 높아지자 올 4월, 임태희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감독시스템 개편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청와대 직속으로 만들어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한 축에선 올 초부터 한국은행법 개정논의가 시작됐다. 골자는 한국은행에 금융위기 대응책임을 부여하고, 감독기능을 보다 강화하자는 것. 하지만 관련당국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4월말 "감독시스템 개편과 한은법 개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정기국회 이전까지 정부 안을 마련하겠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하지만 감독기구 개편논의는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현재 정부 내에선 전혀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기구개편이란 게 지난해 정부 출범 당시 만든 체제를 다시 뒤엎겠다는 건데 어디 쉽겠느냐. 사실상 이번 정권에서는 물 건너 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서병수(한나라당) 국회 재정위원장도 "윤 장관의 말과 달리 실제 기구개편 논의는 전혀 안 하는 모양"이라며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정말 한심한 현실인식"이라고 비판했다.
한은법, 좁혀지지 않는 간극
정부가 그나마 안을 마련중인 한은법 개정안 역시 4월의 '관련당국간 첨예한 대립' 상황과 달라진 게 없다. 요즘은 오히려 국회와 한은이 한편으로, 재정부와 금융위ㆍ금감원, 자문회의 TF가 반대편으로 똘똘 뭉쳐가는 양상이다.
재정부는 '객관적 논의'를 위해 지난달 민간 전문가 중심의 한은법개정 TF를 구성, 개정안 마련을 의뢰했다. TF는 지난 주말 1차 잠정 결론을 냈으나, 한은과 국회의 강력 반발에 부딪혀 일단 재검토에 들어간 상태다. TF의 1차 결론은 '위기를 맞아 금융안정을 지키려면 한은에 감독수단(금융기관 단독 조사권 등)을 줘야 한다'는 국회 재정위의 안과는 달리, 현 한은법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논의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재정위의 개정안은 크게는 7~8개 항목, 세목으로는 30개 정도가 고쳐진 반면, TF의 잠정안은 지급결제, 자료제출요구 관련 등 2~3개항만 바뀐 수준"이라며 "쟁점인 단독조사권은 충분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고 전했다.
한은 관계자는 "TF가 친정부 성향 인사들로 구성되는 것을 보고 애초부터 이런 결론이 나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재정부와 금융위, 금감원은 처음부터 한은에 조사권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상태다.
이에 국회 재정위는 잔뜩 벼르고 있다. 서병수 위원장은 "TF가 거의 변화 없는 결론으로 흐른다는 소식에 당ㆍ정 협의를 요청해 놓은 상태"라며 "한은에 제한적인 조사 수단을 줘야한다는 재정위 의원들의 소신은 강렬하며 입법권은 분명 재정위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국회의 으름장에도 불구, 결국은 한은법 개정 역시 용두사미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법개정을 통해 한은이 힘이 커지는 것에 대해 재정부와 금융위가 끝까지 집요하게 반대할 경우, 국회도 어쩔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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