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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 산에 오르면 - 도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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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 산에 오르면 - 도명산

입력
2009.08.2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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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산에 오르기로 하고 아는 산꾼과 함께 지도를 뒤적였다. 지도의 정중앙에 있는 속리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법주사 정이품송을 지난 적은 있지만 속리산을 오른 적은 없었다.

산꾼은 입석대 문장대의 절경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며 설명했다. 내키긴 했지만 1,057m되는 산의 높이가 내딛던 발길을 붙잡았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산꾼은 그럼 속리산을 멀리서 바라보는 도명산은 어떠냐고 물었다.

처음 들은 산이었다. 산꾼의 이어진 설명에 마음은 금세 그 산으로 기울어졌다. 우선 632m란 높이가 적이 안심됐고, 산이 품은 청정 계곡인 화양구곡의 절경이 귀를 솔깃하게 했다.

도명산 산행은 화양구곡 유람으로 시작한다. 화양계곡의 9개의 절경을 일러 부르는 화양구곡은 조선 초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며 하나 하나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1곡인 경천벽을 스치자마자 주차장이다. 차를 놔두고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계곡길을 걸어 올랐다. 깨끗한 물이 소를 이루는 운영담(2곡)과 우암이 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했다는 읍궁암(3곡)을 지나면 화양구곡의 절정인 금사암(4곡)이다. 맑은 계곡의 널찍한 바위 위에 우암이 서실로 썼던 암서재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첨성대(5곡) 능운대(6곡) 와룡암(7곡)을 지나 학소대(8곡)까지 맑은 물줄기가 함께 했다. 학소대 직전의 철다리를 건너면 도명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이어진다.

학소대까지는 피서객이 무리 지어 지났지만 철다리 건너 도명산 등산로엔 인적이 뚝 끊어졌다. 대부분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더위를 식히러 온 이들이다. 안 그래도 땀이 솟는 염천에 굳이 땀을 쏟아가며 산에 오르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인적 드문 산길은 고즈넉한 품으로 길손을 맞았다. 파랗게 익은 도토리가 흙길에 나뒹굴었다. 지난 밤 폭우의 흔적들이다. 촉촉한 산길을 아무런 방해도 없이 걸었다. 계곡의 물소리, 수풀 속의 풀벌레 소리에 저절로 집중이 됐다. 초록의 터널을 끊임없이 올라야 했다. 이마에선 비가 쏟아지듯 땀이 흘러내렸다.

커다란 바위 군락을 스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길을 벗어나 태양 아래로 나왔다. 그새 다른 산들이 발 아래다. 암흑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맞는 새 세상 같은 느낌이다. 저 아래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여전히 우렁차게 퍼져 오르고 있었다.

주위의 산자락들은 인왕산 치마바위를 연상케 하는 바위들을 가득 두르고 있다. 바위엔 검은 물 그늘이 짙게 배었다. 초록의 천 위에 그려낸 한 폭의 그윽한 수묵화의 느낌이었다.

몇 구비 더 오르자 산길 한가운데 커다란 바위들이 길을 막고 섰다. 바위에 햇빛이 들이치자 가늘게 선각한 마애불이 뚜렷하게 모습을 내보였다. 깎아지른 수직의 암벽에 세 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노." 아무 말 없이 먼저 걷던 노년의 한 등산객이 처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제일 작은 부처의 얼굴은 약간 돋을새김이 돼있다. 얼굴의 선들에 검은 이끼가 내려앉아 윤곽을 뚜렷이 덧칠하고 있다. 주름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시간의 더께다. 불상 뒤편엔 옹달샘이 있다. 바위산 정상이 바로 코 앞인데 어떻게 이 많은 물이 고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마애삼존불을 돌아 오를 때였다. 마주 오던 산행객이 힘을 불어 넣는다. "조금 남았습니다. 정상에 올라 가만히 계시면 땀이 쏙 들어갑니다." 말씀이 참 곱다.

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 5개가 뭉쳐 이뤄졌다. 화양계곡의 기암들을 들어 올렸는지 바위 하나 하나가 신묘하다. 산 아래 화양계곡의 수려한 바위는 물살이 깎아냈다면 도명산 정상의 바위들은 바람이 조각한 것이다.

뾰족하게 생긴 정상 바위에 올라앉아 사방을 둘러본다. 멀리 속리산 자락 묘봉 상학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아스라했고, 그 앞으로 낙영산 코뿔소바위 등으로 이어진 짙은 산자락이 시선을 붙들었다.

첩첩 산자락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떠 있는 느낌이었다. 해가 구름에 숨고 바람도 멎었다. 갑자기 달라진 빛 때문인지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UFO에 올라 앉아 산하를 굽어보는 느낌이다. 주변이 빙빙 도는 듯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정상 주변에는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선 소나무가 여러 그루다. 약간의 흙이 모인 곳에는 상수리 나무가 낮게 가지를 드리웠다.

하산 길은 능운대가 있는 화양3교 쪽으로 향했다. 학소대 코스보다 전망이 좀 더 트인 구간이다. 휘파람을 불며 초록을 만끽했다. 푸르름의 절정이 콧속을 간질였다.

괴산= 글·사진 이성원기자

■ 여행수첩/ 화양구곡

● 중부고속도로 증평IC에서 나와 증평 읍내를 거친 뒤 592번 지방도로를 타고 질마재를 넘어 화양동으로 향한다. 갈림길마다 화양구곡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증평IC에서 화양구곡까지 40~50분 걸린다. 화양계곡 입구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올라야 한다. 승용차 1대의 주차료 5,000원. 너무 비싸다.

● 도명산 왕복 산행은 4시간 정도 걸린다. 화양계곡 선유계곡 쌍곡계곡 인근에 민박집들이 여럿 있다.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분소 (043)832_4347

■ 이성원의 여행편지/ 내 마음의 9곡, 내 마음의 10경

산(山)이 이름에 들어가서인지 충북 괴산군은 유독 산이 많은 고장입니다. 첩첩의 산자락이 휘감은 땅은 또 첩첩의 골을 품고 있습니다. 화양구곡을 비롯한 아름다운 물길이 괴산의 땅을 촉촉히 적시고 있습니다.

괴산의 계곡들은 유독 구곡이란 이름의 경승지들이 많습니다. 중국 남송 때 주희가 무이산 아홉 구비의 경치를 이름해 '무이구곡'이라 한 것을, 주자학을 숭상했던 조선의 선비들이 본떠 지은 것들일 겝니다.

우암 송시열이 이름을 붙였다는 화양구곡의 상류에는 2km 짧은 구간에 아홉 개의 명소로 이뤄진 선유구곡이 있습니다. 1곡인 선유동문을 시작해 경천대 학소암 연단로 와룡폭 난가대 기국암 구암 은선암으로 이어집니다.

계곡은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줍니다. 길지 않은 물길에 기암의 하이라이트만 모아 놓은 듯한 곳입니다. 선유구곡엔 퇴계 이황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곳의 경치에 반한 퇴계가 아홉 달을 머물며 구곡의 이름을 지어 새겼는데 글자는 지워지고 산천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선유구곡에서 연풍 방향으로 오르면 장쾌한 계곡인 쌍곡구곡을 만납니다. 보배산 칠보산 군자산 등이 빚은 절경의 청정계곡입니다. 금강산을 옮겨다 놓은 듯한 소금강을 비롯해 떡바위 문수암 호롱소 선녀탕 등이 쌍곡을 이루는 구곡들입니다.

괴산 수력발전소 뒤편의 갈론마을엔 갈은구곡이 숨어 있고 괴강변에는 고산구곡이 있습니다. 구곡만 5곳을 가지고 있으니 괴산을 구곡의 땅이라 해도 틀리진 않을 겁니다.

이렇게 풍경을 모아 놓고 구곡이다, 10경이다 하는 건 괴산만이 아닐 겁니다. 구곡이나 10경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가만히 있는 풍경을 이렇게 억지로 묶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혼자 놔둬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굳이 이름을 짓고 일련 번호까지 붙여 가며 묶는 것은 너무 인위적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화양구곡이나 쌍곡구곡 선유구곡 등의 절경을 확인하고선 아름답기만 한 구곡을 눈을 흘겨 가며 볼 필요는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괜한 트집을 잡느라 눈부신 절경을 감상하는 시간을 낭비해선 안되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위에 걸터앉아 청류에 발을 담그고는 '내 인생의 구곡' '내 인생의 10경'을 떠올려 봤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하나씩 꼽아 보았습니다.

한번 같이 세어보시죠.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9개나 10개를 꼭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많이 남은 인생이니 충분히 비워 두시고요. 행복했던 특정 순간을 꼽기 어려우시다면 내 인생의 사랑이나 내 인생의 즐거운 여행 같은 작은 주제로 꼽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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