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평선] '유럽소풍' 20주년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평선] '유럽소풍' 20주년

입력
2009.08.20 23:46
0 0

꼭 20년 전인 1989년 여름, 당시 공산권이었던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일원에 동독인 수만이 몰려들었다. 다들 휴가철에 친척을 만난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서독으로의 탈출이 목적이었다. 서독으로 가려면 헝가리를 통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게 제일 빠른 길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얼마 전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의 전기철조망이 제거됐고, 헝가리 민주세력이 동독인 탈출 돕기 캠페인을 벌이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헝가리 당국이 묵인하는 형식으로 8월19일 오후 3시 헝가리의 소도시 소프론에 접한 오스트리아 국경이 열렸다.

■국경검문소 개방 3시간 동안 661명의 동독인이 국경을 넘었다. 이른바 'Pan-Europian Picnic', 굳이 번역하자면 '(범)유럽소풍' 사건이었다. 완강한 철의 장막에 처음으로 구멍을 낸 '유럽소풍'은 통독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이벤트였다. 이후 한 달도 안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완전 개방됐고, 다른 동구국가를 통해서도 서독으로 가려는 동독인들의 대열이 물밀듯 이어졌다. 곧 동독의 철권통치자 호네커 국가평의회의장이 내부저항을 못 견뎌 실각하고, 마침내 그 해 11월9일 밤 10시 넘어 '베를린장벽 붕괴' 뉴스가 세계로 타전됐다.

■그러고 보면 '유럽소풍'이야말로 베를린장벽을 넘어 동구권 붕괴까지를 알리는 장엄한 서곡이었던 셈이다. 이후 독일통일 선포까지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기간에 헝가리, 폴란드, 체코…, 그리고 소련까지 동유럽의 거의 모든 사회주의체제가 사실상 해체됐다. 결국 통일은 서독의 체제와 생활을 선망한 동독주민의 자발적 요구로 이뤄진 것이었다. 최종 통합절차도 동독인들이 독일연방 편입을 스스로 투표로 결정함으로써 마무리됐다. 말할 것도 없이 1970년대 브란트 정부 이후 서독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동방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익숙한 얘기를 새삼 상기하는 것은 '유럽소풍 20주년'이라는 시간적 계기에다, 통일기반 조성에 쏟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각별한 노력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적극적인 지원, 교류를 통해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햇볕정책은 명백히 신동방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독일과는 워낙 다른 역사적ㆍ정서적 조건, 주변여건 등을 따져 그게 과연 우리에게도 최선의 정책인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그렇더라도 그의 큰 구상과 치열했던 시도가 통일여정에 소중한 경험적 자산이 되리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삼가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이준희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