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을 살아 온 나무는 진정으로 500년을 산 것인가. 지금 우리와 만나는 모든 잎은 올 봄에 피어난 것들이며 가을이면 곧 땅에 떨어져 생을 마감할 것이다. 푸른 소나무 침엽도 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붉은 다발로 떨어져 내린다. 거대한 줄기 속을 흐르는 물길 역시 올 가을이면 딱딱한 목질 조직으로 변한다. 결국 500년 세월은 499년 죽어 지내온 세월에 겨우 1년의 살아온 횟수가 살짝 얹혀 있는 시간이다.
나무의 성장은 죽은 조직의 증가를 동반한다. 죽은 조직은 자연적인 것일 수도 있고 상처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상처가 클수록 나무가 이웃 생물에게 베푼 혜택도 클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나무의 살아 있는 조직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나무의 죽음은 새봄이 와도 새잎을 피워내지 못할 때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죽은 몸을 땅으로 바로 쓰러뜨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선 채로 지낸다. 비록 신선한 새잎이 아닐지라도 나무의 거대한 몸집은 많은 생물에게 여전히 욕망의 대상이 된다.
단단하던 수피, 껍질이 떨어져 나가면서 수피 안쪽의 저장 조직은 이내 미생물에게 점령당한다. 생의 독기가 빠진 줄기 속으로 다양한 곤충이 산란을 하고 딱따구리는 구멍을 뚫어 둥지를 짓는다. 가지가 떨어져 나간 줄기 자리는 썩어 큰 동공을 만든다.
이 동공 속으로 빛을 싫어하는 박쥐가 숨어 든다. 부화한 애벌레들이 줄기 속으로 갱도를 내고, 그 갱도를 따라 물기가 스며든다. 줄기에 다시 버섯이 꽃처럼 피어나면 버섯벌레와 달팽이가 버섯의 육질을 음미한다. 이제 죽은 나무는 거의 너덜너덜해져 고단한 몸을 땅으로 꼬꾸라뜨릴 바람을 간절히 기다린다.
딱정벌레와 곰팡이와 바람의 협공으로 땅으로 쓰러진 나무는 본격적인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노래기나 전갈, 지네는 이 자연의 식탁에서 연일 만찬을 즐긴다. 전체 숲 생물 30%가 죽은 나무에 꼬여 든다. 5%에 불과하던 살아 있는 세포는 균사(菌絲), 애벌레, 곤충의 알로 채워져 45%까지 증가한다.
변하는 것은 단지 세포 수만이 아니다. 죽은 나무란 참으로 부담스런 물질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그대로 사용하면 장작이요, 손질하면 책상이다. 그런 조직이 개미 알로, 애벌레로, 버섯으로 탈바꿈하면서 양질의 단백질로 변한다. 수십 년이 그렇게 지난 어느 8월, 더위가 한창인 숲에서 죽은 나무는 그야말로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는다.
사람의 죽음은 단순한 흙으로의 귀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육신이 아닌 정신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미 화장이라는 장례문화는 육신을 흙으로 되돌리는 것을 차단한다. 사람의 죽음은 흙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삶의 궤적으로 후세에 교훈이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우리 시대의 큰 나무가 쓰러졌다. 그의 몸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그의 정신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단순한 풀잎의 쓰러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숲에 영양을 준 큰 나무의 쓰러짐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의 숱한 상처는 이미 우리 사회를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희생이 되었다.
그의 행적에 더 이상 상처를 내지 말고 그의 죽음으로 남겨진 유산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 남은 자의 몫이다. 나무가 죽은 채로 오랜 세월 숲에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교훈이 앞으로 우리 속에서 살아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다른 생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다운 실천이다.
차윤정 생태전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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