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다섯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것처럼 그의 가족들도 'DJ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고난과 영광을 함께 겪어야 했다.
부인 이희호 여사는 납치, 구금, 망명, 연금으로 점철된 남편의 굴곡진 생애를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이다. 세 아들 역시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훗날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19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차남 홍업씨, 삼남 홍걸씨만 자리를 지키며 조문객을 맞이했다. 이 여사와 장남 홍일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여사는 이날 오전 탈진, 병원 20층 VIP병실에서 링거를 맞으며 하루 종일 안정을 취했기 때문이다. 1962년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이 여사는 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으로 남편이 구속된 뒤부터 남편의 석방을 위해 거리로 나섰고, 남편 대신 가장이 됐다.
신산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이 여사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40여년 간 동행한 남편을 떠나보낸 사실은 그에게 그 어떤 슬픔에 비할 수 없었다.
상주인 장남 홍일씨는 서거 당일 휠체어를 타고 몰라보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빈소에 나타났다. 아버지의 영정에 헌화하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애쓰는 그의 모습은 주변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홍일씨는 현재 말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 하지만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임종 시 힘겹게 "아버지"를 세 번 외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홍일씨의 삶도 아버지 못지않게 굴곡지다. 아버지가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1971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구속됐다. 당시 홍일씨가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허리와 척추를 심하게 다친 이후로 김 전 대통령은 늘 미안한 마음을 품어왔다고 한다.
홍업씨도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을 지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 망명시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1997년 대선에서 선거홍보 책임을 맡았다. 반면 홍걸씨는 두 형들과 달리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고등학생 때인 80년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지켜보며 크게 상심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세 아들 모두 사법처리를 받았다. 홍일씨는 2003년 나라종금 로비 수사과정에서 돈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고, 홍업씨와 홍걸씨는 2002년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아버지의 재임 시 구속됐다.
김회경 기자 herm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