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첫째)아, 수민(둘째)아, 임숙(넷째)아, 다경(다섯째)아, 다 챙겼니? 민지(셋째)는 막내 챙기고! 혜지(여섯째), 채림(일곱째)이는 아직 옷 안 입었고 뭐하니?"
18일 오전 충북 청원군의 오영만(55)ㆍ이명옥(48)씨 부부 집. 가족여행을 준비하는 아침 풍경이 마치 전투가 벌어진 듯 부산하다. 스물 여섯 살 첫째 딸부터 여덟 살 막내아들까지 자녀들만 자그마치 8명. 승용차는 물론, 승합차에도 다 탈 수 없는데다, 행여 아이들을 잃어버릴까 싶어 가족 여행은 엄두도 못 냈던 오씨네가 결혼 27년만에 '낯선' 모험에 나섰다.
오전 10시27분께 천안역 플랫폼에 무당벌레를 본떠 몸통 전체를 빨강과 검정으로 채색한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오씨네 가족을 태운 열차는 2박 3일간의 '다둥이 가족 여름기차 여행' 다음 행선지를 향해 힘차게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청주MBC가 기획한 이번 여행에 초대 받은 '다둥이 가족'은 전국 38가구 314명으로 한 가구당 인원이 평균 8.7명이다. '다산성'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전국의 내로라하는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날 오전 9시20분 서울역에서 다섯 가족을 싣고 출발한 열차는 천안역에서 오씨네 등 11가족 95명이 오르자 설렘과 흥분으로 한층 활기를 띄었다.
행사 관계자는 "이들 가족 대부분이 오씨네처럼 첫 가족여행"이라고 귀뜸했다.
오씨네는 오씨의 부모까지 3대가 한 집에 산다. 작년 충북도에서 주는 '다자녀 화목가정 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가족의 달엔 도지사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어머니 이씨는 "남편도 6남1녀 중 장남이라 명절엔 40명에 가까운 친척들로 온 집안이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열차 칸에서는 음악회, 레크리에이션, 풍선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됐는데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건 단연 마술이었다. "자, 여러분들이 주문을 '숑숑숑' 외워주면 책 속 종이비둘기가 살아납니다. 주문을 외쳐주세요, 하나 둘 셋!"
오현철(25) 마술사의 진행에 따라 아이들이 주문을 외우자 책 속에서 흰 비둘기가 두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올랐고, 아이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TV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왕건(최수종 역)의 아역배우로 나왔던 오씨를 알아본 부모들도 즐거워했다.
외아들로 컸다는 오씨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동생 만들어줄까' 물어보면 언제나 '싫다'고 했는데 크고 보니 외롭더라"면서 "결혼하게 되면 오늘 본 가족들처럼 자녀를 많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낮 12시30분께 기차가 구미 역에 도착하자 국내에서 가장 많은 13명의 자녀를 둔 김석태(51ㆍ목사)ㆍ엄계숙(45)씨 가족이 열차에 올랐다. 52개 좌석이 있는 열차 한 칸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이번 여행엔 빛나(23) 다솜(21) 다드림(18) 모아(15) 들(15) 바른(13) 이든(11) 라온(10) 뜨레(9) 소다미(7) 나은(6) 가온(4) 온새미(2) 등 13명이 모두 참가했다.
어머니 엄씨는 "자녀를 너무 많이 낳은 것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비난하는 분들도 많다"면서 "교육비 때문에 그러는데 우리 부부는 생각이 다르다"고 했다. "물론 돈으로 베풀 수 있는 건 부족하지만, 뭔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데 힘써요. 당장 경쟁에 뒤처지더라도 결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사람들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엄씨의 자녀 중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친 자녀는 한 명도 없다. 학교에서 권하는 수준의 과정만 그때그때 배우는 게 교육의 전부다. 그러나 자녀들은 저녁마다 한 테이블에 모여 컴퓨터나 한자, 영어 등을 스스로 공부해나간다.
실제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큰 딸 빛나는 올해 경북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SADI(삼성아트앤디자인인스티튜트)에 들어갔고, 둘째 다솜이도 지난해 우수한 성적으로 충남대 미대에 합격했다.
오후 2시35분 열차가 경주에 도착했다. 가족 수가 많다 보니 버스에 나눠 타는 시간만도 30분 넘게 걸렸다. 첫 여행지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한 경주 밀레니엄파크. 버스에서 내려 밀레니엄파크 입구까지 이어진 행렬에 유독 단출해 보이는 가족이 눈에 띄었다.
자녀가 4명밖에 안 되는 윤상필(39)ㆍ이상은(39) 부부였다. 각각 이비인후과, 소아과 의사인 이들 부부는 의료 스태프를 겸해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 이씨는 "평소에 남들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는데, 여기 오니 우리 가족이 명함을 내밀 수가 없다"며 웃었다.
자녀를 돌보느라 4년 전 일을 접었다는 이씨는 "출산율을 높이려면 여성들을 위해 직장 보육시설 문제가 해결돼야 하고, 그에 앞서 휴직 후 복직이 명확히 보장돼야 한다"면서 "그 부분만 해결되면 정부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모두들 기쁘게 자녀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20일까지 2박3일간 이어지는 이번 행사는 경주 유적지 관람,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견학, 영동 포도따기 체험 등이 진행된다.
경주=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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