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를 포함한 4차례에 걸친 죽음의 고비, 6년간의 감옥살이, 55차례의 가택연금, 수년간의 망명생활, 4수(修) 끝에 오른 대권 고지, 첫 남북정상회담, 한국인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를 조망하게 해 주는 이정표 같은 삶을 살아왔다. 민주 투사이자 인권지도자로, 그리고 민주개혁 세력으로의 정권교체…그가 남긴 족적은 실로 두텁고 길다. 특히 정파와 지역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국내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그는 '한국의 만델라'로 불리는 등 세계적인 위인으로 평가받았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큼 불행했고 그만큼 행복했던 정치인도 없을 것이다.
■유년 시절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양력)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농사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이다. 평생의 아호 후광(後廣)은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뭍으로 올라온 그는 목포 북교 초등학교를 다녔고 이어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에 입학해 43년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와 정치, 예능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일제 식민통치 시기였던 유년과 청소년 시절 그는 반골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학창 시절 작문시간에 일제 식민통치를 비난하는 글을 지어 급장 자리를 빼앗긴 적이 있다"는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정치에 눈을 뜨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그는 한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도 자기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념과 노력으로 정평이 난 그는 곧 해운업계에서 성공한 청년실업가로 급성장한다. 48~50년 목포일보 사장도 지냈다. 50년 6 25 전쟁 도중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직전에 목포교도소를 탈출한 적도 있었다.
전후의 한국정치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이런 정치상황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이 점차 독재로 치닫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현실에 분개, 54년 3대 총선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첫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이후 4, 5대 총선에선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도전했으나 잇달아 고배를 마셨다. 이 과정에서 재산을 모두 날리고 첫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하는 아픔도 겪었다.
■'40대 기수론'으로 야당의 거물이 되다
그가 처음으로 여의도 국회에 입성한 것은 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였다. 하지만 당선 3일 만에 5 16 군사쿠데타가 발발, 국회가 해산되면서 그는 의사당 문을 들어가 보기도 전에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 무렵인 62년 그는 이희호 여사와 재혼했다.
김 전 대통령이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시작한 것은 6대 때인 63년 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다. 그는 65년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듬해 정책위의장을 역임했으며 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대변인 자리도 꿰찼다. 항상 수첩에 깨알같이 일정을 적어 시간을 활용하는 철저한 자기관리, 신문을 보면서도 중요한 대목을 메모해 가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가 몸에 밴 그는 금세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급성장했다. 그는 당시 국회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공부하는 국회의원으로도 유명했다.
당내 입지를 다진 그는 점차 박정희 정권 반대진영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결정적 계기는 69년 3선개헌 저지를 위한 장충단공원 집회였다. 대중 연설에 능했던 그는 이날 연설을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야권의 결속과 민주주의 회복의 희망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가 70년 9월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이다.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을 위한 전당대회는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의원의 3파전이었다. 소수파인 그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 후보에 밀려 2위에 그쳤으나 2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의 김영삼 후보 지지에 반발한 이철승 후보가 지지표를 몰아주면서 극적으로 대통령 후보에 선출됐다.
■사선(死線)을 걸었던 반정부 투사의 길
71년 4월 첫 대선에 출마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겨뤄 46% 득표율, 불과 94만표의 차이로 석패했다. 관권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김 전 대통령이 이겼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이 선거는 국민 속에 '거물 김대중'의 깊은 인상을 심게 됐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그를 박정희 대통령의 정적으로 자리매김해 형극의 길을 걷게 했다.
간신히 선거에 이긴 박정희 정권은 72년 10월 유신헌법을 날치기 처리하면서 독재의 길로 접어 들었다. 민주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혹독한 억압이 시작됐다. 가장 강력한 도전자인 김 전 대통령이 핵심 타깃이 된 것은 당연했다. 그 뒤의 삶은 그가 스스로 비유했던 것처럼 인동초(忍冬草) 그 자체였다.
71년 5월 8대 총선에서 지원유세차량을 타고 가다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그 서곡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은 73년 8월 국가 공권력을 동원, 그를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72년 지병 치료차 일본에 머물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은 그 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현지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도쿄의 한 호텔에서 그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배편으로 현해탄 바다로 끌려갔으나, 일본 해상자위대의 추격과 미국의 강력한 경고로 바다에 수장될 위기를 모면하고 납치 닷새 만에 서울의 자택 앞에 버려졌다.
■민주화와 인권 투쟁의 길
납치사건으로 국내로 돌아온 김 전 대통령은 이후 유신철폐와 민주화 운동을 벌이며 투옥과 가택연금 생활을 반복했다.
연금이 해제된 것은 10 26사태 직후인 79년 12월. 80년 초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정치 해빙기가 오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 해 5 17 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휘말려 든다.
그는 80년 11월 계엄군법회의에서 날조된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무기로,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됐고, 82년 12월 마침내 석방돼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에서도 그는 반독재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85년 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한 그는 다시 가택 연금을 당하지만 김영삼 전 총재와 손잡고 신한민주당을 만든다. 사실상 급조된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면서 김 전 대통령은 또다시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3월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한 그는 본격적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계은퇴 번복 논란 딛고 97년 사상 첫 여야간 정권교체IMF 위기 극복… 남북 정상회담으로 분단의 벽 허물어집권말기 권력형 게이트·아들 비리 터지며 '영욕 교차'
■대통령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
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대권 도전의 길을 걸었다. 6 29 선언 한 달 전인 87년 5월 사면복권된 그는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의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민당을 창당한 뒤 두 번째로 대선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야당 분열의 책임자' '대통령병 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이어 92년 14대 대선에서의 세 번째 대권도전 역시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기반으로 한 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막혀 좌절됐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최대 위기였다. 김 전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일 12월19일 자신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4수(修) 끝에 대권 합격
김 전 대통령은 그 후 93년 1월부터 6개월간 영국에 머물며 독일통일 문제를 연구했다. 그해 7월 귀국한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남북통일문제 연구에 전념했다. '준비된 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은 이 때에도 사실상 계속됐던 것이다.
그렇게 정계복귀 여부를 놓고 저울질을 하던 그는 95년 7월 은퇴 2년반 만에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지금은 비록 비판을 받더라도 당과 국정을 바로잡는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는 것이 '행동하는 양심'을 평생의 신조로 살아온 제가 택할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는 변을 남겼다.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97년 11월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DJP 연합' 결성에 성공, 마침내 그 해 12월 15대 대선에서 40.3%의 지지를 얻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정권 출범과 IMF 극복
하지만 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의 앞에 기다린 것은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제적 위기였다. 집권 직전인 97년 말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0억 달러에 불과했고, IMF 긴급구제 금융으로 연명하는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 직전이었다.
하지만 국민의정부 출범과 함께 우리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칠십의 노구를 이끌고 해외를 돌며 직접 세일즈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감동한 국민들은 장롱에 넣어뒀던 금붙이를 기꺼이 희사하며 경제 살리기에 동참했다. 이로 인해 2001년 8월 당초 계획보다 3년 앞당겨 IMF체제에서 조기졸업했고, 2002년 11월 외환보유액을 1,183억불로 확충해 세계 4대 외환보?뮌막?끌어 올렸다.
■'탈냉전'의 리더
그의 재임 5년 중 가장 눈부신 성과는 바로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이었다. 그는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내세웠다. 그가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부 차원의 대북지원을 표방한 '베를린 선언'은 그 서막이었다. 94년 1차 북핵위기로 인해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에 돌파구가 열렸고, 남북화해 무드는 분단 반세기의 벽을 곳곳에서 허물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는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 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그 뒤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남북장관급 회담,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구성 등이 이뤄졌고, 분단으로 단절됐던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위한 복원공사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노벨평화상 수상
김 전 대통령은 아시아인으로는 일곱번째, 한국인으로는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기록된다. 그는 87년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추천한 것으로 시작으로 수상한 해까지 총 14회에 걸쳐 후보로 올랐다. 13전 14기인 셈이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이란 월계관을 씌워준 것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됐던 그의 정치역정과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평화정착 노력이다.
하지만 외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그와 친분이 각별한 인사나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도 힘이 됐다. 그만큼 김 전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도 각별한 대접을 받는 드문 한국인이었다.
2001년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회의 때 주최국인 덴마크의 라스무센 총리가 각국 정상들을 소개하면서 오직 김 전 대통령에게만 'excellent leadership'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블레어와 시라크, 주룽지와 고이즈미 같은 쟁쟁한 각국 정상들도 아무 수식어 없이 이름만 소개됐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조스팽 프랑스 총리),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 등의 찬사가 쏟아졌던 것을 보면 국내에서 그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계속됐던 시련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권기간 영욕의 교차를 경험해야 했다. 2000년 말부터 이용호게이트, 진승현게이트, 최규선게이트 등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정권 장악력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가신정치와 편중인사가 불러온 결과였다.
2001년 9월엔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둘러싼 갈등으로 정권 탄생의 기반이었던 'DJP 공조'가 깨졌다. 2002년엔 두 아들인 차남 홍업, 3남 홍걸씨가 게이트 사건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다.
2002년 10월 미국 특사단 방북을 계기로 터진 북한 고성능농축우라늄 핵개발 논란은 햇볕정책을 정쟁의 먹잇감으로 전락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재임 중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보지 못한 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 임기 말 터진 '대북 비밀송금 파문'은 참여정부 초기 특검 수사로 이어져 박지원 전 비서실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 그를 도와 정상회담을 이끌었던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아픔을 가져왔다.
■민주 평화 개혁 세력의 거목으로 남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24일 퇴임 후 그의 정치인생을 상징하는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참여정부 5년 동안 그는 국가원로로, 햇볕정책의 전도사로서 강연과 저술, 외교 등의 활동을 조용히 펴왔다. '광복 이후 우리 나라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하면 언제나 수위를 차지하는 존경받는 원로로 자리매김했다.
퇴임 이후엔 정치 현안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해왔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기조가 바뀌었다. 적극적으로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현 정부 들어 대북 관계가 경색된 데 대한 아쉬움이 무척 컸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남북관계 민주주의 민생 등 3대 위기론은 현재 민주당의 대여 투쟁기조와 맞닿아 있다. 민주당 중심으로 민주개혁세력이 통합해야 한다는 '민주개혁세력대통합론'도 말년의 그가 이루기를 원했던 유지였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김회경 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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