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과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회위원회(아태위)가 17일 발표한 '5대 합의'의 요지는 '1년 넘게 지속된 남북간 경색국면을 풀고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 이산가족 상봉 등 각 분야의 교류협력을 재개한다'는 것이다.
합의 문안만 보면 장밋빛이지만, 그 이행이 순조로울 것이라 속단할 순 없다. 남한 정부가 아닌 민간 사업자가 북한을 상대로 작성한 합의라는 법적, 정치적 한계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합의는 어디까지나 민간 차원의 합의"(천해성 통일부 대변인)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현대_아태위 간 합의가 이행되려면 '정부의 검토와 승인_남북 당국간 구체적 이행 방안 협상과 합의 도출'이라는 쉽지 않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이행 의지와 남한 내 여론, 대북 제재를 이어가려는 국제사회의 압박 등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현재로선 북한이 선뜻 합의에 응한 의도가 무엇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앞으로 남북간 후속 논의가 어디로 튈 지 모른다는 얘기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5대 합의 같은 큰 성과를 안고 돌아올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악화에 악화를 거듭했고, 최근까지 남북한 당국 모두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현대그룹이라는 민간 사업자가 정부 대신 나서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모양새가 됐다. 일방적으로 교류의 문을 닫았던 북한이 시혜를 베풀 듯 빗장을 푸는 것도 남측 당국에겐 부담이다. 경과야 어찌 됐든 5대 합의가 실행되기만 한다면 남북관계는 해빙 무드로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현대그룹엔 합의 사항을 이행할 실질적 권한이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합의 사항들 중 정부의 승인이나 남북 당국간 합의 없이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일방적 남북 육로통행 및 북한 체류 제한 조치 철회' 항목이 유일하다. 합의의 정치적, 법적 효력 및 구속력을 두고 남북 또는 남남 간에 논란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대북 정책에 있어 '유연성'보다는 '원칙'을 앞세워 온 정부가 현대_아태위 간 합의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후속 조치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불과 이틀 전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핵 문제 진전이 남북 관계 진전의 선결 조건임을 거듭 강조했다.
천해성 대변인은 이날 "조속한 시일 내에 당국간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라면서도 남북 대화를 먼저 제의할 계획에 대해선 "방북 결과를 자세히 파악한 뒤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합의 사항 중 '추석 때 이산가족 상봉'은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최우선적으로 제기해 온 문제인 만큼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속셈을 모르는 상황에서 5대 합의를 덥석 받는 것도,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뭉개는 것도 부담스럽다"며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큰 틀에서 선별적, 단계적으로 이행을 추진해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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