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민족을 벗어나야만 세계화, 선진화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겁니다. 세계로 나가되, 민족 개념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고구려연구소(현 고구려발해학회)를 설립해 한민족 고대사 연구와 중국의 동북공정 대응 논리 개발에 앞장서 온 서길수(65) 서경대 교수가 29일 정년을 맞는다. 퇴임을 앞두고 지난 13일 만난 서 교수는 고대사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움직임, 인문학의 새로운 트렌드가 된 트랜스내셔널리즘(탈민족ㆍ탈국가적 경향), 한국 사학계의 고질적 폐쇄성 등에 대해 오래된 생각들을 털어놨다.
그는 민족이라는 틀을 고루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에 큰 우려를 나타냈다.
"우리가 쓰는 민족이라는 말은, 이 땅의 모든 역사성을 집약한 개념입니다. 근대 이후 서양사에서 쓰는 민족과는 달라요. 사회가 다양해지고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민족이 굉장히 축소된 개념으로 인식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뿌리는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접을 붙여 여러가지 색이 나오더라도요. 실제 각국은 그런 뿌리를 더 강화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사가 이슈가 될 때마다 언론은 서 교수를 찾지만, 한국의 학제에 따르면 그는 경제학자로 분류된다. 그가 몸담고 있는 곳도 금융경제학과이다. 중국 정부와의 갈등을 무릅쓰고 지난 20년 동안 고구려의 흔적을 누비고 다닌 그에게 학계의 일부가 아직까지 전문성을 트집잡는 이유다.
서 교수는 "여전히 국내에 고구려 전공자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로 사학계의 폐쇄성을 에둘러 비판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역사학자였습니다. 역사가 아닌 논문을 써본 적이 없어요. 율곡의 경제사로 석사를 했고 그 후엔 이자(利子)사를 했죠. 역사학과에서만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편협한 오해예요. 슘페터나 마르크스도 역사가였습니다. 경제사는 일반사보다 훨씬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도 있죠. 시대 구분도 강하고… 사실 박사는 다 Ph.D.인데, 한국에선 무슨 과에서 학위를 땄냐는 사실에 유독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사 전문이던 서 교수가 고대사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1990년 광개토대왕비와 환도산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 계기였다. 젊은 시절부터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는 등 "식민사관을 벗어나기 위한 디펜스적인 성격"의 노력을 했었지만 그는 고구려를 접하고는 "우리 민족이 가진 원래 스케일을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민족운동이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후 고구려의 성 130개를 일일이 밟으며, 서 교수는 한국 경제사에서 고구려 축성법 전문가로 변모했다.
"고구려 연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고구려사를 편입하려는 중국의 의도를 알게 됐어요.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는 2002년부터 진행됐지만, 실제 사업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어요. 그런데 1990년대 중반 그 사실을 한국 학계에 아무리 얘기해도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 거예요. 이슈가 된 건 언론에 의해 문제가 불거진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죠."
서 교수는 공식적인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2007년 종료됐지만 중국은 여전히 '정착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국이 고구려사에 집착하는 진짜 의도를 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대사관에서 누가 찾아와서는 '동북공정과 북한 붕괴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통일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세계는 북한이 중국으로 흡수될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어요. 중국은 국경수비대 외에 20~30만 병력을 북한 접경에 배치했습니다. 그것이 하드웨어라면 동북공정은 소프트웨어예요. 중국은 몽골, 티베트, 신장 등에서 이미 성공을 경험한 노하우가 있습니다."
강단에서 물러나는 서 교수는 당분간 집필로 바쁜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직접 찍은 500여장의 사진을 실은 <고구려 축성법> , 알타이 문화를 다룬 저서 2권 등 그간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 저서 3~4권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개인사를 다룬 퇴임문집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서 교수는 "명예교수 자리도 다 마다하고 진짜 하려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고구려>
"이제는 덜어내는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지난 15년 동안 불교를 공부해 왔어요. 철이 든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봄에는 봄다워야 하고 여름에는 여름다워야 하고… 지금 나는 가을의 막바지에 있겠죠. 생사를 걸고 확고하게 걸어야 할 길을 찾았으니, 다시 그 길을 가야죠."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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