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놈, 일하기 싫으니 저 지랄이여." 이웃의 수군거림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잡놈의 잡풀은 뽑고 뽑아도 해가 뜨면 징그럽게 다시 올라왔다. 어린 남매 발목을 나무에 매놓고, 부부가 하루 내 김을 맸건만 다음날이면 비웃듯 맨 자리가 시퍼렇다. '한방(제초제)이면 작살낼 수 있으련만.' 수십 번 곱씹다가도 한번 작심 한 터라 꾹 참았다. 일은 남보다 더해도 표가 안나니 물정 모르는 이들 눈엔 배추밭이 아니라 잡초밭일 수밖에.
견딜 수 없는 건 애지중지 키운 녀석들을 세상이 몰라줄 때다. 독한 농약 안 먹여 실하디 실한 푸성귀가 골골마다 푸대접이다. 말주변도 없고, 괜한 자랑 같아 배추 앞에 차마 '유기농'을 못 붙인 게 화근일까. 트럭 가득 유기농 배추를 포기당 200원씩 팔아 차 기름 넣고 점심한끼 때우니 동전 몇 알만 호주머니에서 절렁절렁 운다. 하긴 벌써 17년 전이니 유기농이라고 떠들었던들 씨알이나 먹혔으랴.
지금이야 '유기농'을 최고로 쳐주지만 초창기엔 어림없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않는다'는 단순한 원칙마저도 농군은 "농사를 모른다"고 비웃었고, 소비자는 "믿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가짜 유기농' 뉴스(대부분 오보였다)라도 터지면 생떼 같은 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유기농 1세대'는 이처럼 20년 가까이 신산(辛酸)을 버텼다. 풀무원 명일엽(신선초) 녹즙의 8할을 책임지고 있는 강원 원주시 신림면 용암3리의'연봉정 유기농우회'(8가구)가 대표적이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월급 100만원만 주면 작파 하겠다"던 하소연은 "가구당 월 매출 1,000만원 이상"이란 자랑으로 바뀌었다. 15년째 사소한 흠결없이 '무(無) 농약, 무(無) 비료' 약속을 지키며 풀무원과 계약을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
소 똥은 약에 쓸래도 없다
원대일(47) 회장은 "똥 구입하는 게 가장 애로"라고 했다. 유기농이라 직접 퇴비를 만들어 써야 하는데 주재료인 소 똥(축분)이 귀하다는 것. 사료를 먹인 소는 2차 오염의 가능성이 있어 친환경으로 인증 받은 축사에서만 축분을 공급 받아야 한다. 15톤 트럭 한 차에 30만원, 1년이면 150차(4,500만원)가 필요하니 똥 치워주고 거액까지 지불하는 셈이다.
그뿐이랴. 함께 섞는 볏짚과 등겨도 유기농만, 톱밥은 직접 깊은 산에서 캐내와 써야 한다. 섞고 썩히는 과정까지 더하면 노동시간도 만만치 않다. 다 따지면 화학비료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예전엔 마늘 호박 고추 등 귀한 작물에만 썼다는 인분은 사람 몸이 하도 오염된 탓에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죽하면 "퇴비 문제를 해결해야 유기농이 산다"고 할 정도.
진딧물의 천적은 무당벌레?
농약을 안 치니 해충은 손으로 직접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징그러워서 나자빠지는 인부(아줌마)는 둘째 치고 면적(현재 4만평)이 넓어지자 속수무책이었다. 독성이 있는 가래열매 껍데기를 4시간 우려내 뿌리기도 하고, 고등어와 막걸리를 함께 썩혀 농약대용(이상 전래기법)으로 썼다.
최근엔 '난황유'를 많이 쓴다. 식용유 1톤에 달걀 노른자만 50개 정도를 섞어 밭에 뿌리면 작물에 얇은 막이 생겨 해충을 굶겨 죽인다는 것. 정확한 배합비율과 제조비법은 비밀. 효과는 좋지만 비린내를 맡는 게 고역이란다.
천적농법도 활용하는데 상식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진딧물의 천적 무당벌레는 실제는 무용지물이란다. 김진해(48)씨는 "무당벌레는 비싸기만 하고 그냥 날아가버리는 통에 칠레산 이리응애를 많이 쓴다"고 했다. 해충퇴치교육을 받고, 새로운 천적관계를 살피고, 소문난 유기농가를 찾아 기법을 전수 받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웃마을 접대도 필수다
1년 365일 쉴 틈이 없지만 꼭 접대하는 곳이 있다. 옆 마을이다. 농약은 바람타고 근방 4㎞까지 날아간다. 제아무리 농약을 안쳐도 인근 마을에서 농약살포를 하면 만사가 허사다. 이규학(48)씨는 "농번기가 되면 막걸리 접대라도 해야 농약 뿌리는 날을 알려줘 비닐하우스 창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유기농을 통해 농사기술뿐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는 셈이다.
가끔 암행어사도 들이닥친다. 풀무원은 유기농 계약 농가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예고 없이 토양과 작물 등의 시료를 채취해간다. 김정희 풀무원 PM(제품매니저)은 "문제가 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다. 믿지 못하는 게 영 서운하지만 100% 청정농업이기에 불만은 없다.
그래서 가장 서운한 말이 "할 것 없으면 농사나 짓지"라는 세간의 푸념이다. 원 회장은 "숱한 실패 속에서도 정직한 땅을 믿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며 일궈낸 터전"이라며 "매일 30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창출기업이기도 하다"고 했다. 일당 3만5,000원에, 농한기와 쉬는 날 빼면 연간 700만원이 넘는다. 논농사 7,000평을 지어야 손에 쥘 수 있는, 농촌에선 큰 돈이다.
보람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우리더러 '미친 놈'이라고 했던 이들이 차츰 '미친 놈'(유기농 확산)이 되고 있잖아요."
원주=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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