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진로문제로 고민에 싸여 있었다. 고 1 때부터 나의 꿈은 경제학을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서울상대에서 공부했으면 했다. 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나의 관심이 국가적 개인적 가난을 극복하는데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경제학을 공부해야 하고 적성에 맞는 직업은 교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꿈은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장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여동생은 아직 나이 어려 노동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우수한 성적으로 초등학교를 나온 여동생이 진학도 포기한 형편인데 집에서 고등학교 다니기도 힘든 상황에서 서울 가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 우리 집 형편으로는 내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부모님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 딱 맞는 그러한 형편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하기로 했다. 학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이 학교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전에 가서 시험을 쳤다. 당시 이리공고에서 8명이 합격하였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시름이 쌓여만 갔다. 해사가 매우 좋은 학교이지만 내가 가려는 길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데 군에 가면 이것이 어렵다는 점, 그리고 형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3대 독자에 두 집 혈통을 이어야 하는 양가일손이라는 점도 우려되는 일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고생이 되더라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로 가야 한다면서 끝까지 반대하셨다.
그래서 결국 가족회의 끝에 해사진학을 포기하고 일 년 동안 학비를 저축해서 다음해 서울상대에 응시하기로 하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갈림길을 일생에 몇 번 맞닥뜨린다고 하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첫 번째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낮에는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석유등잔 불을 켜놓고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한 해를 보냈다. 내가 직접 일을 하기 때문에 농사도 잘되고 집안 형편도 나아져서 한 해 동안 쌀 다섯 가마가 저축되었다. 이것은 등록금 등 입학수속 비용을 내는 데는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해인 1955년 초봄, 나는 서울상대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 때 어머니는 점심으로 고구마 다섯 개를 싸 주셨다. 휴전한지 두 해가 되었지만 그 때 서울에는 전흔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으며 민생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1955년의 통계를 보면 1인당 소득은 65달러(2008년 약 2만달러), 연간 수출액은 2,400만달러(2008년 4,220억달러), 도매물가 상승률은 연 82%였고 남한 인구는 2,050만명으로 오늘날의 절반도 안 되었다.
서울역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으로 가는데 길가에 곰탕집·나사점(羅紗店)·복덕방 등의 간판이 많은데 도대체 무엇 하는 집인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곰탕집에서는 곰 고기를 파는 줄 알았다.
시험을 치고 나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경쟁도 9대1로 높았지만 시험도 잘 보지 못했다. 그런데 발표 일에 가보니 합격 된 것 아닌가. 꼴지 쯤 된 것이 틀림없지만 그 때의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을 안고 집에 와보니 할머니가 돌아 가셔서 상중이었으며 몇 달 뒤에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그 뒤 돌아가실 때 까지 6년간을 누워계셨다.
소망하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나에게 새로운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 때 서울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잘만 구하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나는 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있는 세 가족은 모두 노동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내려가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등록만 해 놓고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시험 때가 되면 올라가 친구 노트를 빌려 시험을 치는 변칙적인 대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내게 노트를 빌려준 친구는 여럿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빌려 준 사람이 경기상고를 나온 서울 토박이 김정헌인데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공인 회계사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당시 내 여동생은 서울대생들은 모두 그렇게 시험 때만 학교에 가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어렵게 사는 고모님이 계셨는데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주로 여기 있었다. 방이 없어 다락방에서 지내기도 하고 앞집 한씨 아저씨가 마루를 빌려주어 거기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 때 서울상대는 종암동 현재의 서울사대 부고 자리에 있었는데 노란색 건물에 소나무숲이 울창했고 교정에는 종암동 버스 종점이 있었다. 주변은 황량한 무ㆍ배추밭이었는데 지금은 주택이 밀집한 도심이 되어 버렸다.
나는 마포 한강변에 있는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학교에 가기도 하고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 전차로 성동 역까지 가서 거기서 약 2킬로미터를 걸어가기도 했다. 학교에 가서 유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내게 꿈과도 같은 행복이었다.
다만 그 무렵 친구들은 명동의 돌체, 종로의 르네상스 등에서 음악감상을 즐겨 했고 극장과 당구장을 많이 드나들던 때였는데, 나는 그 축에 끼지 못해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예술적 감각이 무디고 감성이 메마르다는 말을 아내에게서 듣는데 그러한 성장환경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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