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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집시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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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집시의 유언

입력
2009.08.1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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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여름은 용광로 같다. 뜨거운 태양, 피어 오르는 지열, 뒤엉킨 자동차, 밀려오는 관광객, 장사꾼의 호객소리와 땀 냄새가 뒤섞여 정신이 몽롱하다. 그 뜨거운 열기를 헤치며 한 무리의 집시 소녀들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혹시 소지품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잔뜩 경계를 한다. 한참 동안 주위를 서성이며 노골적으로 나를 살피던 소녀들은 빈틈을 찾지 못했는지 이윽고 다른 행인들에게 관심을 돌린다.

잠시 후, 갓난아기를 들쳐 업은 20대 초반의 젊은 집시 여자가 구릿빛 얼굴에 땀을 흘리며 내 앞을 지나간다. 한낮의 따가운 뙤약볕 속에 잠든 아기는 엄마 등에 매달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엄마가 걸을 때마다 아기의 머리와 팔은 헝겊으로 만든 인형마냥 바닥을 향해 덜렁거린다. 아이가 무사할까 걱정스럽다.

철판처럼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를 힘겹게 걸어가는 아기와 엄마의 모습은 그들의 험난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집시들은 평균 수명이 다른 유럽인보다 15년이나 짧을 만큼 궁핍하고 비위생적이며 의료 혜택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한다.

로마나 밀라노 같은 대도시 주변에 있는 집시들의 거처는 경악할 수준이다. 고속도로 옆 벌판에 비닐과 판자로 얼기설기 움막을 짓고 화장실도 세면장도 없이 수십 명씩 모여 산다. 그렇게 몇 달을 살다가 어느 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면 그만이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쓰레기와 오물만 남겨져 있다.

유럽 역사에서 집시들은 항상 '악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다. 특정한 직업이 없이 구걸과 도둑질,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데다가 기독교 문화를 거부하고 미신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편견과 경멸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떠도는 삶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다. 그들에게는 호적도 국적도 없다. 사회와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사회적 책임이 없을 뿐더러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자신들을 지켜줄 국가적 실체를 갖지 못한 탓에 박해와 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체념의 세계는 게오르규의 소설 <25시(時)>가 상징하는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 버린 후의 폐허의 시간", "메시아가 와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인간 부재의 시간과 흡사하다.

하지만 집시들이 저주 받은 운명과 멸시를 언제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앞둔 늙은 집시가 자식들에게 남겼다는 유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유언은 집시에 대한 편견을 일거에 불식시킬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죽거든 세워서 묻어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는 왜 죽어서 서 있으려고 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영원히 그렇게 서서 자유를 찾아 걷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살아서 천대 받았던 그가 죽어서도 눕지 못하고 꼿꼿이 서서 자신의 인격적 존재감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허만하의 시집 제목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를 떠올렸다. 그 집시의 유언이 세찬 비처럼 수직으로 서서 살갗 위로 따갑게 내리 꽂힌다. '선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 너머로 비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자 빗방울조차도 숭고하게 만드는 초월적 행위이다. 죽어서도 서 있고자 하는 집시의 주검은 저주 받은 자신의 운명을 숭고하게 반전시킨다. 그는 자신이 '자유'와 '존엄'의 숭고한 인간 존재임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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