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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인문학의 광복(光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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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인문학의 광복(光復)

입력
2009.08.1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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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주년 광복절이 지났다.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음'을 의미한다. 수천 년 동안 주권독립 국가였지만 일제에 주권을 잃었다가 1945년 다시 찾았다는 뜻이다. 해방 공간에서 반탁(反託)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만년 역사를 독립국가로 살아왔던 자존심이 신탁통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치사적으로 '광복'은 맞는 표현이다.

신생국 수준에서 시들어

그러면 우리 인문학은 어떨까. '광복'을 기해 우리 인문학도 '빛'을 되찾았을까.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이전에 '우리 인문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개화기 역사를 다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은 원전이 한문이라서 대학 졸업자도 읽을 수 없다.

영어 권 독자들은 500년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지금도 읽을 수 있지만, 우리는 100년 전 우리 것도 읽을 수 없다. 단군 이래 100년 전까지 우리 선조가 작성한 거의 모든 문헌이 번역이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에겐 '딴 나라' 책이다. 우리는 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의 과거로부터 대부분 단절되어 있다. 이런 형편이니 1세기 전의 '우리 인문학'을 거론조차 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945년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하다가 한글을 본격적으로 쓴 지가 이제 겨우 60년이다. 그러므로 '모국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갓 태어난 아프리카 신생국과 다를 바 없다.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현실이다. '빛을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에서는 광복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인문학은 60년 전 '탄생'했다.

얼마 전부터 인문학 위기란 말이 유행처럼 나돌고 있다. '위기'란 잘 나가다가 추락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하지만 지난 60년 동안 과연 우리 인문학이 잘 나갔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종종 언급되는 '인문학 르네상스'란 말도 마찬가지다. 르네상스란 말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황금시대가 중세 천년의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인문학이 황금시대를 누려본 적이 있었던가. 물론 없다. 우리 역사의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인문학 위기'보다는 오히려 '인문학 고사(枯死)'가 잘 어울리는 표현으로 보인다. 떡잎 단계부터 영양실조 상태로 비틀거리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말이다.

모국어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역사가 이제 겨우 60년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반만년 역사 운운하며 느긋한 허위의식에 안주할 수 없다. 신생국 처지임을 자각하고 새로 시작하는 결연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간적·공간적 단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끊어진 역사를 연결시켜야 한다. 아직 20%도 이루지 못한, 우리 선조들이 남긴 국가기록물과 개인 문집의 번역 작업을 이른 시일 안에 완료해야 한다. 이 작업이 완결되어야 비로소 반만년 우리 역사가 온전히 우리 것, 즉 한글 콘텐츠로 편입될 수 있다.

고전 번역 늘려 '독립'을

다음으로 공간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수많은 동서양의 고전을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영어 공부, 물론 해야 한다. 하지만 영어에 쏟는 비용의 100분의 1이라도 외국 고전 번역에 투자하자. 그리하여 온 국민이 한글만으로도 전 세계의 수준 높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 한글 콘텐츠 확충 사업은 인문학 차원의 '건국 운동'이다. 모국어에 대해 이만한 자긍심과 비전을 갖지 못한 나라를 나는 진정한 주권독립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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