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라이슬러 "가격, 기술… 현대모비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듈을 생산한다구요?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만들 수 있을까요?" "후발주자로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모듈밖에 없어요. 단순 부품 생산만으로는 미래가 없습니다."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국내 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쓰러지던 1999년 8월 울산 현대정공. 당시 갤로퍼를 생산하던 현대정공은 차량생산부분을 현대차에 넘겨주고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생존을 위한 전략회의를 수개월째 이어갔다. 글로벌 톱 10의 자동차 부품회사의 사례를 분석한 끝에 내놓은 답은 '모듈'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자동차 부품조차 생산해 본적이 없는 회사가 모듈을 생산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탓이다.
임원들 가운데도 의견이 엇갈려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때 정몽구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 "답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해 봅시다. 도전합시다."
정 회장은 세계 자동차 업계가 생산 비용 절감을 위해 작은 부품을 일일이 납품 받아 조립하기 보다는 부품이 기능별로 모여 있는 모듈을 선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90년대 후반 세계 자동차 업체의 화두는 '생존을 위한 경쟁력'확보와 '인수합병'이었다. 완성차는 핵심인 엔진 개발에 선택 집중하고, 나머지 부분은 비용절감에 나설 것이라는 계산에서 정회장은 '모듈 생산'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만해도 모듈 생산은 일부 유럽에서 소규모로 이뤄졌던 '미개척' 부품 생산 양식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예측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불과 10년도 안돼 현대모비스는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의 크라이슬러는 물론 BMW, 폴크스바겐 등 세계유수의 완성차 업체로부터 '납품해 달라'는 러브콜을 잇따라 받고 있다. 세계 자동차 제조업에서 '현대모비스=모듈'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다.
처음 모듈을 생산하는 과정은 '무박 16일'이라는 하나의 전설로 내려온다. 99년 8월 모듈생산을 결정하고 덜컥 현대차에 트라제의 새시 모듈을 10월 15일까지 납품하기로 약속했다. 설비라인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어진 시간은 단 3주. 경영진은 서둘러 협력회사를 정하고 직원들은 16일 동안 공장에서 숙식을 하며 생산라인을 만들었다.
"달력을 보니 날짜가 한참 지나 있더라구요. 그사이에 추석연휴도 있었고"(정정환 해외모듈팀 부장) "직원들이 생산라인을 만들지 못하면 내년 추석은 길거리에서 맞을 지 모른다는 각오로 일했습니다. 라인이 만들어 지고 새시모듈이 나오는 날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납니다."(정용덕 울산공장 이사)
그 후 잇따라 싼타페, 카렌스, 쏘렌토의 모듈을 생산, 자신감을 얻은 현대모비스는 숨쉴 틈도 없이 곧바로 해외로 눈을 돌렸다.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 도전한 것. 그러나 미국 자동차들은 고개를 젓기 일쑤였다. 모듈을 주문 생산하는 것이 비용 절감에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현대모비스의 '품질'을 믿지 못했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 크라이슬러. 현대모비스는 당시 크라이슬러의 대표적인 지프모델 랭글러에 들어갈 컴플리트새시 모듈(자동차의 뼈대와 조향장치 등을 조립한 덩어리)에 도전했다. 완성차에 들어가는 2만여 개의 부품중 8,000여 개의 부품을 조립해야 새시 모듈이 된다. 당시 경쟁상대는 벤틀러(Bentler), 다나(Dana), TRW 등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업체. 수 차례 프리젠테이션을 했지만 크라이슬러는 반신반의했다.
결국 기술력을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며 다임러크라이슬러측의 피터 로젠펠트 부사장 등이 직접 한국을 방문, 생산라인을 둘러보고서야 도장을 찍었다. 선정의사를 밝히고도 6개월간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중에 크라이슬러 측이 말하더군요. '처음에는 가격 때문에 끌렸는데 기술면에서도 월등해 현대모비스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박상규 모듈사업본부 전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델파이와 TRW를 찾던 세계 유수의 완성차 업체들이 현대모비스에 의사 타진을 해왔다. 7월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회사인 다임러와 1억3,000만 달러, 폴크스바겐과 2,000만 달러 공급 계약을 각각 체결했다. BMW와 스바루도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모비스는 아직 배가 고프다. 완성차 업체에서 엔진과 타이어만 조립하면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브레이크 시스템와 에어백 등 핵심 기술과 친환경 부품 생산이 필수. 답은 연구개발 뿐이다. 현대모비스는 현재 1,000명 수준의 연구인력을 2015년까지 2,000명으로 늘리는 등 연구개발에만 1조2,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정석수 사장은 "친환경 차량은 물론 차에 관한 부품이라면 무엇이든, 심지어 졸음운전 방지 시스템 개발에도 도전하고 있다"며 "드라이빙 사이언스(Driving Science)로 글로벌 기업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모듈이란?
자동차는 크게 엔진과 이를 전달하고 운전이 가능하도록 하는 각각의 모듈로 이뤄진다. 핸들과 조향장치, 편의장치 등으로 이뤄진 운전석 모듈, 조명 등 차의 앞 부분에 들어가는 프론트엔드와 프론트 새시 모듈, 차 뒷부분을 구성하는 리어새시 모듈 그리고 구동, 제동 부품으로 이뤄진 새시모듈이 있는데 새시모듈은 차체와 다른 모듈이 연결될 경우 컴플리트새시 모듈이 된다.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 현대모비스 고속성장 비결
IMF 구제금융 이후 10년 만에 현대모비스가 초고속 질주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생산방식의 혁신과 철저한 품질관리에 있었다. 이를 통해 세계 완성차 업체가 원하는 것(needs) 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내놓다는 게 모비스의 전략이다.
현대모비스가 생산하는 모듈은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기 전에 모두 테스트 단계를 거친다. 또 모든 제품 마다 부품의 정보를 바코드화해 불량 모듈 생산을 미리 차단하고 있다. 완성차 입장에서 현대모비스가 납품한 모듈에 대해서는 따로 비용을 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모듈생산을 총지휘 하고 있는 임채영 부사장은 "고객인 완성차회사에 우리가 납품하는 제품은 걱정할 것 없다는 확신을 줘야 파트너십이 성립한다"며 "조립이 끝난 차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기존에는 완성차가 문제 부품을 찾고 고치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 비용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모듈 생산방식에 있어 JIS(Just In Sequence)는 현대모비스의 자랑거리. 도요타 생산방식으로 널리 전파된 'JIT(Just In Time)보다 효율적이고 진화된 생산방식이라는 평이다. 도요타의 JIT가 완성차 업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부품을 공급하는 것이라면 현대모비스의 JIS는 시간은 물론 완성차의 조립 '순서'까지 고려해 납품하는 것. JIT의 경우, 부품업체는 완성차의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일정량의 재고를 보유해야 하지만, JIS는 완성차 조립과 같은 서열로 모듈부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재고부담이 제로에 가깝게 된다. 그 결과는 바로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전용덕 울산공장 이사는 "예전에 우리가 배우기에 급급했던 도요타의 관계자도 우리 JIS 방식을 부러워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지 묻곤 한답니다"라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현대모비스는 친환경 차량 개발 경쟁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임 부사장은 "앞서지 못하면 결국 뒤쳐지고 도태될 수 밖에 없다"며 "자동차 제조 패러다임 전환과정에서 세계 선도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