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세대인데 왜 소설을 쓰느냐구요? 글쓰기가 좋은 걸 어떡합니까?”(최수정ㆍ여ㆍ서울 대원외국어고3)
대학 입시와 학교 시험 준비로 시간에 쫓기는 서울의 중ㆍ고교 재학생 12명이 용돈을 모아 소설집을 냈다. 친구들이 영화나 비디오에 쏠려 있는 동안 김동리의 <무녀도> 와 김훈의 <칼의 노래> 읽기에 푹 빠져 지내는 ‘문학 키드’들이다. 칼의> 무녀도>
유기웅(청원고3), 곽진솔(무학여고3), 문지은(영훈고3ㆍ여) 등 12인이 최근 출간한 소설집의 이름은 <연필숨> (경지원 펴냄). 책이름은 이들의 창작 동호회 이름이기도 하다. 연필숨>
이들은 2006년 서울 성북교육청이 개설한 문예창작영재교육원에 등록하면서 처음 만났다.
“아버지가 문학 애호가여서 집안 서가에 소설책과 시집이 항상 빼곡했습니다. 아버지가 교육원 등록을 격려해주었습니다.”(곽진솔)
“초등학생 시절 제가 좋아하던 담임 선생님이 동화작가여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최수정)
서로 관심사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교육원을 마친 직후 창작 동호회 ‘연필숨’을 만들고 네이버 카페(cafe.naver.com/masoul)를 운영하면서 문학 활동을 해왔다. 카페에는 이들이 정기모임, 습작과 품평을 하면서 올려놓은 게시물 1,100여건이 올라와있다.
만만치 않은 습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들의 창작 단편에는 심리 묘사가 흐르고, 복선이 깔려있고,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곽진솔양의 ‘양극성’은 여고 재학생이 교실에서 교사의 무미건조한 수업을 듣다가 환각의 세계에 빠져드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곽양은 1인칭 화법을 사용해 소외감, 자의식을 드러내는 한편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기웅군은 ‘혹성의 마지막 전사’에서 휴대폰 문자 메시지, 댓글, 미니홈피가 소통을 활발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백의 홍수와 소통 부재를 낳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용돈 10만원씩을 모아 어렵게 출판사를 구한 끝에 이 달 초 소설집이 나왔다. 그러나 소설집이 나오자 이들은 친구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뜻밖의 반응을 듣고 있다.
“수능 특기자 입학이나 다른 목적을 노리고 소설집을 내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저희들은 모두 정시 모집에 지원할 예정입니다. 창작의 결과물을 책의 형태로 갖고 싶다는 욕심, 그것이 전부입니다.”(곽진솔)
“소설쓰기를 통해 내면의 고민을 달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소설쓰기는 학업에 도움이 됩니다.”(최수정)
요즘 문학계에서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유기웅군은 “영상이 무정란(無精卵)이라면 문자는 유정란”이라며 “영화나 비디오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기교의 발전에 그칠 테지만 소설이나 시는 인간 영혼의 자양분으로 다시 의미를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학에 진학하면 더 열심히 소설을 쓰고 신문의 신춘문예에도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소설가 김훈 선생님처럼 신문기자 생활도 해보고 싶습니다.” (곽진솔ㆍ문지은).
소설가 오대석(혜화여고 교장)씨는 “기성작가도 동인 소설집을 내는 게 쉽지 않다”며 “그간의 습작 과정에서 쌓인 글쓰기 실력이 확 드러나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했다.
이민주 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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