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에는 대학사회에 반정부투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의 대회전을 앞둔 숨고르기였을 뿐 박정희 정권을 용인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의 상황은 서울법대에서 ‘전국대학생연맹’ 명의로 발표한 ‘4ㆍ19 10주년 백서: 학생운동의 나아갈 길’이란 문건이 잘 말해주었다.
언론이 학생운동 왜곡하자 1070년 '자유의 종' 발행
평화시장 기사로 만나봐야지 하던 중 '분신사건' 일어나
처음 본 사람에게 온갖 말씀 해주시던 어머니 인상깊어
이 문건은 당시의 상황을 ‘미국의 신고립주의적 세계전략에 따른 일본의 재등장, 박정희 정권의 친일 사대적 대일의존정책으로 말미암은 한국경제의 대일예속 심화, 선건설ㆍ후분배라는 그릇된 개발철학에 따른 근로자들의 참상, 삼선개헌의 범죄적 단행에서 드러난 의회민주주의의 몰락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차단, 병영국가적 폭력지배를 위한 향토예비군과 교련(학교군사훈련)의 강화, 상업주의 에로문화의 보급을 통한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 조장, 야당의 시녀화와 언론의 어용화’ 등으로 규정했다. 이어 학생운동의 방향과 과제로 ‘박정희 정권의 친일사대적 편향 경계, 근로대중의 생존권 투쟁 지원, 반팟쇼민권투쟁의 강화를 통한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 실현’ 등을 제시했다.
이 문건은 법대 4학년 조희부가 책임지기로 하고 발표되었으나, 쓴 사람은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조영래였다. 사법시험 공부 중인 사람이 이런 문건을 쓰기도 어렵지만 그 내용을 보면 조영래가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 있다. 나는 그 당시 복학한지 얼마 안 되어 묵을 곳이 마땅찮아 조영래가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용구암(경기도 일산)이란 암자에서 그와 함께 묵었는데, 이따금씩 학생운동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그의 집념과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 수 있었다.
이 문건은 당시 학생운동의 지침이 되었던 바, 무엇보다 전국의 주요대학에서 열린 한일문제 강연회나 토론회가 이 문건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법대에서는 9월 초에 ‘한일문제대강연회’를 개최했는데, 다른 대학의 학생들까지 많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이날 합동통신 외신부장이던 리영희 선생의 한반도 주변정세와 관련한 강연이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이 학생사회에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지금도 언론이 문제지만 그때도 언론이 문제였다. 지금은 언론사의 자사 이기주의 때문에 편가르기를 조장해서 합리적 판단이 어렵도록 하는 것이 문제지만, 그때는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 때문에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문제였다. 오늘날도 언론을 바로잡지 않고는 정치를 정상화하기 어려운 것과 같이, 그 때도 어용화된 언론을 바로잡지 않고는 민주화를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언론의 어용성을 규탄하고 언론인의 맹성을 촉구하는 일을 엄청나게 많이 했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학생운동을 알리는 신문을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하고 사회법학회의 원정연, 최형무, 이상덕 등과 의논해서 만든 것이 ‘자유의 종’이었다. 초기에는 내가 주로 기사도 쓰고 편집도 했지만 뚝심이 강하고 헌신적인 원정연이 많은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이신범의 역할이 컸다. 이신범은 글도 잘 쓰고 연설도 잘하는 데다 수사관들을 따돌리는 임기응변 능력도 뛰어나 오랜 기간 ‘자유의 종’ 발행인의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자유의 종’이 ‘지하불온유인물’이 되지 않게 했다. 그리고 학생운동권 최대의 논객이라 할 채만수가 중요 기사를 많이 썼다.
‘자유의 종’은 학생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면서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화에 크게 기여했고,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 신문이 나오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가정교사를 하고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열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유의 종’ 2호(1970.10.13)에 평화시장에 관한 신문기사를 발췌해서 실은 것이 내가 전태일 분신사건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됐다. ‘먼지 속 13시간 노동’이란 제목의 이 기사를 읽고 평화시장에 한번 찾아가보려고 마음먹었는데, 한일문제강연회 문제로 동대문경찰서에서 나를 잡으러 다녀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났다. 미리 찾아가보았던들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어 자책하면서 전태일의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 어머니는 ‘아들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시신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참이었다. 피신해 있는 처지라 직접 성모병원 영안실로 가볼 수가 없어 법대 4학년 문경용과 함께 성모병원 근방에 가서 전태일의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게 했다.
명동성당 앞 ‘3ㆍ1다방’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는데, ‘서울법대 학萱琯?아드님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일이가 평소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그토록 말했는데, 죽고 나서야 찾아왔구나”라고 하시며 두 시간 넘게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한 일을 말씀하셨다. 점심을 굶는 어린 시다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는 자기는 걸어서 집에 오다가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잡혀간 일, 근로기준법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머니에게도 가르치려 한 일, 시다를 돌보려다 공장에서 쫓겨난 일,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평화시장에는 발도 붙이기 어렵게 된 일, 그리고 분신 후 근로감독관이 취한 몰인정한 태도 등에 관해 폭포수같이 열변을 토하셨다. 심지어 전태일을 낳기 전의 태몽까지도.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온갖 말씀을 다 한 데다 학생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까지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니, 그리고 이 인연이 40년째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으니, 이 만남은 숙명적이 아니었나 싶다. 이날 들은 내용을 학생총회 등을 통해 말했는데, 이것이 전태일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전태일 사건’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는지는 다음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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