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숙 지음/푸른책들 발행ㆍ280쪽ㆍ9,800원
"내 나라, 내 땅에서, 내 백성들 틈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 게야. 응! 알겠느냐 말이다."(140쪽)
20세기 초 낯선 이국 땅 묵서가(멕시코). 술 취한 조선의 양반은 애섧게 흐느꼈다. 그의 갓은 남미의 타오르는 햇빛 한줄기조차 가리지 못했다. 오히려 '상것'들이 들고 온 누더기가 훨씬 더 쓸모있었다. 여기서는 1,033명의 조선인 모두가 에네껜(Henequen)농장주의 노예였다. 에네껜은 밧줄의 원료로 쓰이는, 가시가 많고 독소가 있는 선인장과 식물이다. 큰 돈을 벌겠다는 '묵서가 드림'은 '에네껜의 설움'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리고 영영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조선은 사라졌다. 묵서가로 향하는 배를 탄 순간부터 이방인의 삶은 숙명이었다.
이 책은 광복절을 맞아, 1905년 을사조약 이전 멕시코로 팔려간 조선인들을 떠올린다. 2005년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으로 반짝 조명을 받았던 이들의 삶이 청소년 역사소설로 다시 독자들을 찾았다. 지은이 문영숙씨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에네껜 아이들'을 접하고, 사실적인 작품을 위해 3년의 노력을 쏟았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닷새 일하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다는 광고에 속아 '일포드 호'에 승선한 덕배 등은 에네껜 농장으로 팔려간다. 에네껜을 수확하면서 가시에 몸을 찢긴 이들은 노예와 다름없는 고초를 겪으며 마음까지 산산이 헤진다. 양가집 규수는 농장 감독관에 의해 몸을 더럽히고 자살하며, 평범한 아기 엄마는 사탕수수 공장 기계에 치여 죽는다.
그 사이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이들은 더 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묵서가의 조선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한데 모여 마을을 만들고, 백정 출신인 덕배와 양반집 자제 윤재는 함께 '조선인 학교'를 세운다.
슬픈 근대사를 그리면서도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양반인 옥당대감의 무능력과 여성의 끈질긴 생활력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신분과 성 차별에 대한 비판의식도 엿볼 수 있다. "그만 하세요! 왜 개돼지처럼 때립니까? 우리가 짐승이에요?"(172쪽)와 같은 대목은 국내 외국인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해, 현 시대 디아스포라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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