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4호선 혜화역을 나오자 폭이 넓은 횡단보도가 보인다. 보행자가 얼마 없자 횡단보도는 폭이 스스로 줄어든다. 장애인과 노인이 길을 건너려 하자 이번엔 녹색등의 점등시간이 자동으로 길어진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휴대폰에 목적지를 입력하자 도로 바닥에 목적지를 향하는 화살표가 깜빡인다. 도로 바닥 전체가 센서가 달린 거대한 디스플레이어다.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우리 현실에서 실현될지 모르는 '상상'이다. 11일부터 13일까지 동숭동 제로원 디자인센터에서 열린 '제1회 MIT미디어랩 서울 워크숍'에서 나온 작품 중 하나다.
1985년 설립된 MIT 미디어랩은 과학과 미디어를 결합하는 획기적 기술로 학계와 산업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연구소. 실제 유비쿼터스, 전자종이, 3차원 홀로그램, 입는 컴퓨터 등을 최초로 개발해 말 그대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상상력의 공장이다.
MIT 미디어랩의 워크숍이 국내에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 워크숍은 주최측 연구원 14명과 4대1의 경쟁률을 뚫은 참가자 140여명이 참가해 12개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주재범 미디어랩 연구원은 "시간이 짧아 걱정이 많았는데, 참가자들이 내온 결과물 중에는 우리도 생각치 못한 기발한 것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짧은 기간동안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쏟아진 것일까.
워크숍 첫날인 11일 MIT 미디어랩 출신 중에서도 '브레인스토밍의 달인'으로 통하는 정기원 연구원이 이끄는 '휴머니스트 대 테크놀로지스트' 그룹 연구실. "'새로운 우산'에 대한 아이디어를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보세요. 제한시간은 15분. 시작!" 정 연구원의 지시에 10여명의 참가자들이 민첩하게 우산과 관련해 불편했던 점과 해결책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당일 일기예보를 못 봤을 때 우산을 들고 나갈지를 어떻게 결정하죠?" 선윤아(28ㆍ여)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학원생인 이현진(24ㆍ여)씨가 빠르게 포스트잇을 붙이며 답했다.
"습도가 일정 정도 높아지면 색깔이 바뀌는 재질로 우산을 만들면 어떨까요?" 옆에 앉은 정상용(22ㆍ남)씨가 "무선인터넷으로 기상정보를 수신해서 비가 오는 날에는 자동으로 우산함 문이 열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라고 덧붙였다.
어느 정도 아이디어가 나왔다 싶자 정 연구원이 "그럼 물에 젖은 우산을 어떻게 보관하면 좋을까"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런 식의 질문과 응답으로 시간은 금새 흘렀다.
시간이 종료되자 벽에는 어느 새 160여장의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학생들이 그 중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를 골라, 결국 '자동으로 우산을 내놓는 우산함'과 '비가 오지 않을 때에도 물건 걸이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우산' 등이 최종 아이디어로 결정됐다.
비슷한 시간 로보틱 서비스 그룹. 이민경 카네기멜론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칠판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적었다. "~하면 ~한다" "~가 자동이면 좋겠다" "~가 바뀌면 좋겠다" . 참가자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갸우뚱거렸다. 이 연구원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해 각자 가능한 답을 많이 생각해보라"고 했다.
잠시 뒤. "조명이 바뀌면 얼짱이 된다", "때리면 잘한다", "상품을 주문하자마자 바로 가졌으면 좋겠다" 등 평소 상상했던 소망들이 쏟아졌다. 이 연구원은 이어 "우리 그룹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서비스 로봇을 연구하는 그룹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말한 것들을 로봇에 하나씩 적용해보죠"라고 제안했다.
난상토론 끝에 이 그룹은 사람과 소통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마네킹 로봇, 재활용 쓰레기 수집으로 기부를 돕는 자선로봇 등을 최종 아이디어로 선택했다.
정기원 연구원은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는 빠른 시간 안에 아이디어를 모아야 각자가 자기의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서 "가장 좋은 의견을 도출하는 방법은 가장 많은 의견을 모으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각 그룹들은 워크숍 첫날인 11일 치열한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선택한 뒤 이튿날부터 밤을 새우며 시연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에너지 절약 등 친환경 아이디어들이 단연 두드러졌다. 재료 디자인 그룹은 빛 굴절이 잘 일어나는 재료를 활용해 여분의 빛(태양광, 아파트 복도등 등)을 한데 모아 으슥한 뒷골목 등 빛이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시스템을 제시했다.
에너지 그룹에서는 휴대폰이나 노트북 배터리에 남은 전기를 곧바로 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머니' 개념을 창안했다. 그밖에 계단을 밟을 때 음악이 나오는 등 오락적 요소를 가미해 엘리베이터 사용을 줄이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정재우 MIT 미디어랩 박사과정 연구원은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 있는 데는 전공과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주제로 연구하는 '미디어랩식 학제간 연구방법론'이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워크숍에 참가한 카이스트 3학년 남유정(22ㆍ여)씨는 "내 공부와 남의 공부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는지 안 겪어봤다면 몰랐을 것"이라며 "내년에도 꼭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워크숍의 결과물과 작업과정을 담은 동영상은 같은 장소에서 15, 16일 이틀간 전시된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