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의 춘추전국시대다. 비비안 비너스 등 전통 란제리 강자들의 아성에 청바지 업체가 맞불을 놓은 가운데 여성복 업체의 라인 확장 전략에 따른 브랜드 출시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비자들로서는 골라 입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가지. 브래지어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부자재만 30여가지다. 늘어나는 천(브래지어 끈)과 늘어나지 않는 천(브라컵과 후크 부분 등), 와이어, 실리콘, 레이스 등 온갖 이질적 소재들을 환상적으로 버무려야 한다. 자동화는 언감생심이고, 봉제도 까다롭기 짝이 없다. 이런 속옷 시장이 어째서 진입 문턱은 그리 낮은 걸까?
올해 속옷 시장에 새로 명함을 내밀었거나 내밀 예정인 업체만 줄잡아 10여개를 헤아린다. 불경기로 신규 브랜드의 출시가 주춤한 가운데 속옷 시장만 예외다. 게스 언더웨어가 2월 첫 선을 보였고 4월엔 리바이스 바디웨어가 출시됐다.
여성 캐주얼브랜드 에고이스트, 중ㆍ장년층 브랜드인 여성크로커다일도 각각 3월과 6월에 이너웨어 라인을 내놓았다. 역시 캐주얼브랜드인 지지피엑스 잇 걸의 이너웨어와 스포츠브랜드인 푸마 바디웨어, 남성패션브랜드 듀퐁의 듀퐁 언더웨어가 가을 시즌 첫 선을 보인다.
패션 대기업들도 속옷 시장을 속속 노크한다. 제일모직은 망고의 이너웨어 라인인 망고스위트를, 코오롱패션은 쿠아의 란제리 브랜드 런칭을 추진 중이다.
청바지나 여성복 업체의 속옷 시장 진출은 한마디로 브랜드 이미지에 업혀가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잘 키운 브랜드 하나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가능케 하는 핵심. 대표적 성공 사례가 캘빈클라인진의 CK언더웨어다. 진브랜드 이너웨어라는 신 시장을 개척한 이 브랜드는 지난해 4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속옷도 패션 소품의 하나로 인정받는 추세라 강력한 네임밸류를 가진 브랜드들의 경우 신규 고객 확보는 물론, 동일한 고객을 상대로 종목을 달리해 두 번 장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임정환 리바이스 바디웨어 마케팅팀장은 "특히 청바지 브랜드의 경우 고객들의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 마니아층을 확보하기 수월하기 때문에 시장에 비교적 빠르게 안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겉옷 업체들이 속옷 시장에 손쉽게 뛰어드는 데는 달라진 제조 환경도 한 몫 한다. 박종현 남영비비안 홍보팀장은 "불과 7, 8년 전만 해도 란제리에 사용되는 원단과 봉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업체가 매우 한정적이었지만 최근엔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에 아웃소싱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생긴 것이 속옷 시장 진입 문턱을 크게 낮췄다"며 "대부분의 속옷 시장 신규 진입 업체들이 라이선스 형태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바이스 바디웨어는 섹시쿠키와 보디가드 등을 내놓고 있는 속옷 전문 업체 좋은사람들이 라이선스로 제조한다. 리바이스 미국 본사에 로열티를 내고 이름만 사용하는 것이지 실제 리바이스와는 관계 없는 셈이다.
게스 언더웨어, 듀퐁 언더웨어 역시 브랜드 사용료를 내고 생산은 국내 업체가 주도하는 라이선스 방식이다. 여성복 업체들의 속옷은 대부분 속옷 전문 OEM 납품 업체를 이용한다.
이 달 속옷 시장의 최대 화제는 유럽 매출 1위 브랜드인 트라이엄프가 국내 진출 20년 만에 사업을 접은 것이었다. 아시아권에서도 중국 시장 1위, 일본 시장 2위 등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 브랜드가 국내에서 철수한 것은 꽤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국내 속옷 시장 규모는 약 1조 2,000억원. 이 중 70% 가량을 빅 5로 불리는 남영비비안 신영와코루 트라이브랜즈 좋은사람들 BYC가 점유하고 있다. 이들의 최대 장점은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다양한 사이즈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직수입 체제로 운영되던 트라이엄프의 브래지어 패턴이 10종 안팎인 것에 비해 남영비비안의 경우 100종이 넘는다.
결과적으로 속옷의 성패는 브랜드 명성과 더불어 한국인의 체형을 고려한 상품을 내놓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라이브랜즈 관계자는 "라이선스의 경우 한국인의 체형을 고려한 제조가 가능한 것이 장점이지만 그 점이 오히려 '무늬만 유명 브랜드'라는 반감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패션 업계 조차 속옷 시장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종현 팀장은 "지난해 좋은사람들이 M&A시장에 나왔을 때 수십억 원대의 단기 순익이 나는 업체였는데도 속옷 업계에서는 사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었다. 그만큼 속옷 시장은 기존 강자들의 장악력이 크고 착용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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