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방향이 바뀐다. 조금 전까지 또렷하게 보이던 봉우리가 안개에 갇혀 모습을 감춰 버렸다. "이런 날씨 같으면 백두산 볼 확률이 80% 이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재중 동포 안내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사실 올해 들어 제대로 천지를 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차다. 이곳은 여름에도 평균 기온이 10도다. 부지런히 '1236계단'을 오르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두꺼운 옷으로 재무장했다. 짙은 구름에 천지의 풍경이 다 가려지기 전에 오르려 계단을 연신 밟았다. 산 언덕엔 노랑민병초가 연녹색 융단 위에 촘촘히 박혀 꽃 무늬를 그리고 있다.
중국 서파 쪽으로 올라 만난 백두산 능선의 높이는 해발 2,470m. 다시 한 번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났다. 백두산이다. 가장 높은 장군봉(2,750m)을 주봉으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 열여섯 개의 봉우리가 천지개벽하듯 별안간 모습을 드러냈다.
천지도 그 자태를 살포시 내 보였다. 해가 비추자 천지의 물은 그림 물감을 풀어 낸 듯 형형색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짙푸른색, 옅은 연두색 그리고 서늘한 청녹색 등이 교차하며 호수를 물들였다.
청정의 물 속으로 그냥 풍덩 뛰어들고 싶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천지의 신비함에 한참을 넋을 놓았던 사람들이 그제서야 한두 마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백 번 올라야 두 번만 제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 백두산이라고 한다던데 처음 올라와서 이렇게 멋진 광경을 마주하는 걸 보면 우리는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나 봐."
북한 양강도 삼지연과 중국 지린성에 걸쳐 있는 백두산은 2,500m 이상인 봉우리 16개를 거느리고 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 등 8개는 북한에, 나머지는 중국에 속해 있다.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오르는 길이 뚫렸으면 좋겠지만 언제 길이 열릴지는 누구도 기약할 수 없다. 대신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오를 수 있다.
백두산의 중국 루트는 크게 3가지로 북파 서파 남파 코스가 있다. 가장 일반적이며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은 장관인 장백폭포를 끼고 오르는 북파 코스다. 온천으로도 유명한 코스다. 그 다음은 천지가 용암을 분출해 만든 금강 대협곡과 고산 지대의 야생화가 아름다운 서파 코스고, 남파 코스는 북한과의 경계선을 타고 오른다.
서백두(서파)로 가는 길은 고구려 유적 탐사를 겸한 역사 기행이기도 하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만 가면 중국 다롄에 도착한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100대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다.
이곳에는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워 기세를 올린 비사성이 있다. 이 성을 뒤로 하고 버스로 쉼 없이 4시간여 달리면 북한의 평북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단둥에 도착한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오르내리면 북한 주민이 강변에 나와 고기를 잡거나 더위를 식히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단둥에서 또 5시간 이상을 버스로 달리면 지린성 지안이다. 가는 내내 차창 밖으론 끝없는 옥수수 밭이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다. 드넓은 만주 벌판이다.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이곳에는 시내에 국내성 성벽이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 장수왕릉은 한국인들에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이 넓고 중간 부분이 약간 좁다. 한국사의 타임 머신이라 불리는 이 비 맞은 편 남쪽으로 큰 굴뚝이 보인다.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 일대다. 북한 땅이 지척이다. 압록강에서 중국인들이 빌려 주는 보트를 타고 북한 쪽으로 가까이 가자 북한 주민 한 명이 인사하듯 눈을 맞췄다.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길로 주민을 가득 태운 트럭이 한 대 지나간다. 깡마르고 고단해 보이는 얼굴이다.
북녘의 현실과 만주의 옛 영광을 곱씹으며 지안에서 5시간여 버스로 달려 가면 백두산의 서파 입구다.
백두산= 글·사진 신상순 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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