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워싱턴내 싱크탱크의 한 논객은 최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 북미간 '조용한 양자 외교(quiet bilateral diplomacy)'의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여기에는 이번 양자 외교가 억류됐던 두 여기자의 석방을 위해 필요했음을 인정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는 바로 이어서 이런 식의 양자 외교가 북핵 등 북미 당국간 현안 해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 자체가 북한에 대한 또 다른 굴복, 또는 양보로 인식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우리 국내적 이념 스펙트럼에 비추어 보면 보수적 목소리에 가까울 이러한 이분법은 실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시종 민간 차원으로 규정됐지만 방북을 이끌어낸 양자 외교가 북미 정부 당국간에 이루어졌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뉴욕채널을 통했든, 아니면 다른 경로를 활용했든 북미 당국간에 대화가 오갔다면 그 내용이 억류 여기자들 문제에 국한됐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북핵 협상 재개를 위한 서로의 입장과 조건 등을 둘러싸고 탐색전이 치열했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탐색의 결과다.
요즈음 상황에서 북핵 6자회담이 먼저냐, 아니면 북미간 직접 양자 협상이 우선이냐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비현실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사실 북한은 물론 미국도 서로가 내건 최소한의 협상 개시조건만 갖춰지면 언제든 양자회담을 감행할 태세가 돼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미국은 6자회담의 틀을 고수한다고 하지만 지금의 정세로는 북미간 양자 협상을 선행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 위에 6자회담의 모자를 씌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양자 협상의 결과에 달려 있다. 2007년 1월에도 북미는 베를린에서 먼저 비밀 양자 회담을 가진 뒤 우여곡절을 거쳐 6자회담 재개에 이른 적이 있다.
실상이 이렇다면 우리가 6자회담은 가(可), 북미 양자회담은 불가(不可)를 관철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이유도 없고 그럴만한 실익도 없다. 그보다 우리에게 실로 사활적인 부분은 북미간 협상을 개시할 때 서로가 양해한 최소한의 조건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느냐 여부다.
아니 동의 수준을 넘어 북한의 직접적 위협을 받는 우리의 숙명적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조건을 세워 나가는데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이는 보다 구체적으론 미 언론에서 간헐적으로 제기되는 대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북핵 정책이 비핵화에서 반확산으로 선회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얘기다.
6자회담 폐기를 선언한 북한은 북미간 직접 양자협상을 고집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북미 양자협상의 경험을 갖고 있고 그 결과가 19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다. 그러나 당시에도 북미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경수로 건설을 떠맡은 것은 한국, 일본, 유럽연합(EU)이 주축이 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였다. 북한은 미국이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회담의 형식도 중요할 수 있으나 항상 기본은 북한핵을 확실히 없애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데 있다. 이를 위해선 과거의 유화국면, 최근의 제재 상황을 철저히 분석해 무엇이, 어떤 때에 북한을 움직이게 했는지를 가려내 필요하면 제3의 길이라도 가야 한다. 한미공조를 강조하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태성 국제부장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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