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91년 전인 1918년 가을.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 한반도에 돌림병이 번졌다. 9월 초부터 시작된 병은 이달 하순에 이르러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듬해인 1919년 초까지 742만명이 병에 걸렸고, 이 가운데 14만명이 죽었다.
당시 무오년(戊午年) 독감으로 불렸던 이 병은 세계적으로 창궐하던 스페인독감이 틀림없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 악명을 떨친 주범이다. 1918년 3월~1920년 6월 유행했던 이 독감으로 최소 2,500만명~5,000만명 정도가 숨졌다는 게 의학자들의 분석이다. 앞서 120년 전인 무오년(1798년)에도 정체 모를 독감이 한반도를 덮쳤다. 사망자는 12만8,000명으로 추정된다.
스페인독감이 발병하자 각국은 병의 전파경로와 처방법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죄수들을 상대로 생체감염 실험까지 했다. 당국은 62명의 해병들에게 제안을 했다. 병원균을 접종한 후 살아 남으면 곧바로 사면하겠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동의했고 연구가 시작됐다. 죄수들은 보스턴항 근처의 한 섬에 격리된 기지로 이송됐다. 해군 군의관들은 독감으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코와 목에서 나온 진득진득한 점액을 채취해 한 집단의 죄수들의 코와 목구멍에 뿌렸다.
또 다른 집단에서는 이것을 눈에 떨어뜨렸다. 환자의 콧물을 빼내 지원자의 콧속에 넣기도 했고, 환자의 피를 뽑아 죄수의 살 속에 주사하기도 했다. 10여명의 지원자는 고열에 헛소리를 하는 독감환자와 얼굴을 가깝게 맞대고 환자의 악취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지원자는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환자의 기침을 5회 이상 받아야 했다. 건강한 지원자들은 각각 1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 사람의 죄수도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실험은 보스턴만 아니라 미국 다른 도시와 일본에서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전염경로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든 결과였다.
이처럼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80년 가까이 독감 바이러스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바이러스의 정체를 어느 정도 벗겨 낸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 였다. 하지만 1918년 생체실험에서 전염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해 각국 당국은 올겨울에 바이러스의 2차 공세가 시작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스페인독감도 초반기에는 공격성이 약했으나 두번째 공격에서는 악질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올겨울을 대비해 미리 신종플루를 앓아두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뉴욕타임스의 과학전문기자인 지나 콜라타는 1999년 출간한 저서 (독감·사이언스북스 발간)에서 올해 신종플루를 예견이라도 한 듯 이렇게 경고했다. '1918년 독감 바이러스를 체포했지만 아직 범인이 사용했던 살인무기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고 있다.
당시 바이러스는 하나의 바이러스가 완벽하게 치명적인 균주로 만들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예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과 새 사이에서 살인독감이 태동할 수도 있고, 젊은이의 허파 속에서 두 바이러스가 유전자를 재배열할 것이다. 우리가 독감에 오만해지는 동안 독감은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최진환 정책사회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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