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일본군의 항일의병 진압 내용을 상세하게 담은 기록이 발굴됐다.
한국토지공사 산하 토지박물관은 11일 항일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7년 7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일본 보병 14연대의 의병 진압 기록을 담은 책자 '진중일지(陣中日誌)'를 공개했다.
14책의 이 책자에는 일본군의 의병 진압 상황과 함께 작전지도 및 토벌계획약도 50여점, 타 부대의 진압 상황 등이 기록됐다. 진압 당시 기온, 군수물자, 부대 이동, 무기 등에 대한 내용이 날짜별은 물론 분 단위까지 기록됐다.
이 책자에 따르면 일본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앞두고 격렬한 항일의병 활동이 예상되자 7월 25일 1,291명 규모의 14연대를 파견했다.
14연대는 7월 26일 부산항에 도착한 뒤 본부를 대전, 문경, 대구 등지로 옮기면서 의병을 진압했다. 이들은 각지 파견 중대에 의병의 활동상과 동태 등을 전보, 전화, 밀보 등의 형식으로 보고토록 했으며 그것을 '진중일지'로 기록했다.
일지에는 일본군의 잔혹한 의병 진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1907년 9월 15일 문경 부근에서 의병장 이강년 부대와 격돌할 당시 일본군은 의병이 거주하거나 숨어있던 마을을 아예 소각하도록 했다.
의병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문경의 대승사를 불태우려 하다가 승려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존치시켰는가 하면 같은 이유로 주민 김성달과 김달용을 사살하기도 했다. 또 작전 수행에 필요한 군량의 3분의 1을 지방에서 조달하라는 지령을 각 부대에 내렸다는 대목에서는 지역 양민 수탈 사실이 확인된다.
일지는 당시 의병의 활동상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의병장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1908년 9월 9일자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의 3도 도원수 윤영수와 그 휘하의 박동의 등 대장 3명이 등장하는데 당시 의병 편제로 볼 때 박동의가 거느린 부대는 15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윤영수, 박동의 등은 아직 공훈자로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중일지'를 근거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진중일지'가 다루는 시기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해 구식 군인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무기를 들고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던 때로, 의병 활동은 일본군의 진압 작전에 밀려 1909년 이후 사실상 중단됐다. 심광주 토지박물관장은 "'진중일지'는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1차 자료로 매우 상세하고 정확한 기록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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