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버블이 한창이던 2000년 무렵 미국의 CNBC 방송은 이른바 '서류가방 지표'라는 새 '금리예측모형'을 만들어 냈다.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 출석할 때, 들고 오는 가방의 두께에 따라 금리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가방이 얇아 보이면 이미 결심이 섰다는 뜻. 반면 가방이 두꺼우면 경기판단을 위한 자료가 많이 필요하다, 즉 그린스펀의 머리가 복잡하고 고민이 많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린스펀은 추후 "가방의 두께는 그날 내가 점심도시락을 싸 왔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라며 이 가설을 부인했지만 어쨌든 언론이 가방두께까지 신경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린스펀이 재임 시절 통화정책방향에 대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알듯 모를 듯한 그린스펀의 특유의 화법을 두고 '건설적인 모호함'(constructive ambiguity)이란 표현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금융통화위원회를 마치고 기자간담회에서 한 발언들은 '두꺼운 서류가방'에 가까웠다. 금통위가 예상대로 기준금리를 6개월째 2%로 동결한 상황에서, 시장의 관심은 온통 이 총재의 입에 쏠려 있던 터. 이 총재는 분명 과거에 비해 긍정적 경기 판단을 제시했지만, 불확실성 부분에 대해서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설명이 길어졌고 신중한 표현도 많았는데, 보기에 따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소지가 많았다. 그린스펀 스타일의 은유는 없었지만, 그 역시 '모호'화법에 가까웠다.
낙관 혹은 신중
이 총재는 "2분기 성장률이 예상 외로 상당히 높게 나왔다"면서 "6월 지표로 봐서는 한국은행이 얼마 전 발표한 2분기 GDP 성장률 추정치보다 확정치가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하반기에도 전분기 대비 플러스 성장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부쩍 늘어난 주택담보대출과 주택가격 상승에 대해서는 "상당한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상황"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박혁수 동부증권 연구원은 이를 "앞에서는 어르고 뒤에서는 회초리를 준비하는 모습"이라고 평했다.
여기까지라면 금리인상시기는 좀 더 가까워졌다고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이 총재는 여전히 단서를 달았다. "주요 선진국 경기 회복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국내 고용사정도 정부대책으로 지표상 개선은 됐지만 그 효과가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확실한 면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최근 시장금리 상승이 조금 앞서 나간 상황이며 시장 금리의 조정과정이 있을 수 있다"고 시장이 너무 앞서 나가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출구전략' 발언도 비슷했다. "출구전략의 방법은 당연히 논의해야 한다" "특수상황에서 시장에 공급했던 외화를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도 출구전략에 포함한다면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는 대목은 꽤 전향적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기준금리가 2%까지 내려간 것은 특수상황인데 아직 꼼짝도 안 했고 총액한도 늘렸던 것이나 채권안정펀드, 자금확충펀드 같은 것도 변화가 없으니 원화 쪽에서는 움직임이 없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해, 결국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결국 이날 이 총재의 발언은 '3분기를 지켜보고 금리인상여부를 논의해보자'는 기존 수준에서 한걸음도 더 나가지 않은 셈이다.
시장반응
시장도 이 총재의 이날 발언을 "시장금리가 단기적으로 떨어지길 바라지만 3분기 경제성장률을 보고 빠르면 4분기, 늦으면 내년 초쯤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공동락 토러스증권 연구원은 "당국의 향후 정책 스탠스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면서도 동시에 시간적 여유는 여전히 충분하다는 것을 시사했다"면서 "단기간 시장금리가 떨어지겠지만 3~6개월 중장기적으로는 채권매도(금리인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시장금리는 국고채 3년물이 전날보다 0.06%포인트, 5년물이 0.04%포인트 떨어지는 등 큰 폭으로 하락했다. 이 총재의 발언으로 시장의 조기금리인상 기대가 다소는 희석됐다는 의미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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