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적을 감춘 아빠를 찾아 엄마는 집을 나선다. 남겨진 어린 두 자매는 고모 집에 맡겨지고 엄마는 종내 무소식이다. 자매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고모 품을 벗어나 시골 외가로 옮긴다. 자매는 그렇게 부모의 보살핌 없이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난다.
아이들에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쓰라린 기억이지만, 어쩌면 비정한 이 현대사회에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다. 그러나 재미동포 김소영(41) 감독의 영화 '나무 없는 산'(27일 개봉)은 이 특별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아주 특별하게 만든다.
돼지저금통이 가득 차면 엄마가 돌아오리라 믿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일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 영화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에큐메니컬상을 받는 등 세계영화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4월 22일 첫 유료시사회를 시작으로 15개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김 감독은 데뷔작 '방황의 날들'(2006)로 이미 세계영화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민에 따른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청소년들의 방황을 차분한 시선으로 담아내 베를린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과 미국 선댄스영화제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특별상 등을 받았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미술을 전공한 그는 1999년 영화감독 겸 프로듀서인 남편 브래들리 러스트 그레이의 촬영을 돕다 뒤늦게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부산 출생인 김 감독은 12세에 미국으로 이민갔던 자신의 경험담을 녹인 '방황의 날들'처럼, '나무 없는 산'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았다. 그는 9세 때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미국으로 먼저 떠나면서 오빠, 여동생과 함께 3년간 고모들 집을 전전했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두 자매가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는 영화 속 장면 등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자매의 웃음소리가 희망을 말하며 끝을 맺는 영화의 결말은 김 감독에 대한 할머니의 애정과 무관치 않다.
"할머니가 지닌 모성애에서 낙관적인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따스함 그 자체였습니다." 김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할머니) 김옥남에게 바친다'(Dedicated to Ok Nam Kim)는 문구를 새겨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나타냈다.
김 감독은 영화 촬영도 할머니와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포항시 흥해읍을 찾아서 진행했다. 그는 "내 기억 속에서 한국은 시골이고, 고향에 대한 정서도 시골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영화 속의 두 자매 진과 빈을 연기한 김희연(7), 김성희(5)양은 학교와 보육원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캐스팅했다. "연기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어떤 행동이든 연습해서 하게 되니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자매의 외조모 역할은 맡은 할머니는 촬영 이틀 전 흥해읍의 시장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배우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 '미쳤냐'며 도망가던 할머니를 겨우 설득했다"고 했다.
영화 두 편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10여개의 상을 받았지만 김 감독은 "영화제 수상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나무 없는 산'의 영화제 수상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소박한 미소를 지었다.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욕심도 없다. 그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이 즐거울 뿐"이라는 것이다.
김 감독은 "차기작은 철없는 아빠와 한 어린 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과 절망 그 어디쯤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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