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자행한 반인륜ㆍ반인권 범죄에 대해 법원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 배상에 대해선 '소멸시효'를 이유로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현행법과 대법원의 판례에 비추어 볼 때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로 피해자 구제가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법원은 올해 선고된 나주 집단학살, 인혁당재권위, 울산보도연맹, 문경학살 사건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들 사건이 모두 국가 주도의 반인륜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혁당사건과 울산보도연맹을 제외한 두 사건에선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국가에게 배상책임은 묻지 않았다.
나주학살과 문경학살 사건 재판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시효는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5년, 불법행위라고 안 때부터 3년'이라는 민법 조항을 근거로 판단했다.
1950년 주민 97명이 총살된 나주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53년에 이미 불법행위를 인지한 만큼 지난해 소송을 제기한 것은 늦었다는 것이다. 49년 주민 86명을 사살된 문경학살 사건도 마찬가지 이유로 피해자측의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됐다.
하지만 피해자측 변호인은 두 사건 모두 2005년 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라 설치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에서 2년 전에야 해당사건을 국가의 위법행위로 결정해 "구체적 진실규명이 뒤늦게 이뤄졌다"며 "소멸시효는 이 때부터 3년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현행법상 불법행위의 인지시점을 과거사위의 결정이 내려진 이후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와 달리, 울산보도연맹 사건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9부는 올 2월 손해배상 청구권의 기산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전향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부는 불법행위의 인지시점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사실을 알게 된 때로 전제, "국가의 위법행위에 대해 사법기관(과거사위)의 판단을 거치지 않고 의심만으로 소송을 청구하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과거사위의 결정이 나온 날을 기산점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상당수 판사들은 기산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국가에 배상책임을 지우는 건 어렵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법관들은 국가범죄와 개인분쟁에 대해 똑같은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현행법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지난해 대법원 확정 판결을 그 근거로 들고있다.
특별법을 통해 98년 진상규명이 이뤄지고서야 제기된 이 소송에서 유족은 1심 승소 후 항소심에서 패소했고,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도 "시효가 소멸됐다"며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한 판사는 "4년의 장고 끝에 내린 대법원의 판례가 금세 바뀌기는 어렵다"며 "해당 사건의 주심이 진보성향의 이홍훈 대법관이었다는 점에서도, 적극적으로 법리를 살펴봐도 소멸시효를 연장해 국가에 배상책임을 묻는 건 현행법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현행법으로 구제가 어려운 만큼 국가범죄에 한하여 소멸시효와 무관하게 배상 또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법 제정에 입법부가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회복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만 명시된 과거사정리법으로는 적절한 배상이나 보상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배상금액이 국민의 세금에서 충당되는 만큼 합의를 통해 '적절한 조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과거사정리법의 하위 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경학살사건 소송을 맡았던 김수정 변호사는 "하급심에서부터 국가에 면죄부를 줄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피해자측 승소 판결을 통해 대법원 판례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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