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아트가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언뜻 상상해 보아도 이 둘 사이의 만남은 아주 특별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패션은 보통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만큼 스피디하다.
나 역시 요즘 다가올 10월 1일에 있을 파리 컬렉션 준비로 밤잠을 줄여가며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늘 새로운 것, 남들이 하지 않은 것들을 보여줘야 된다는 생각으로 깊은 고민의 날들을 보낸다.
그런데 아트는 아주 오래 전부터 패션의 이런 고민에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해왔다. 20세기 초 산업화를 거친 패션이 자본과 유명세로 무장하면서부터 아트는 패션의 활력소가 되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성공한 디자이너들은 아티스트의 메세나(후원자)가 되기를 자청하면서 이 둘 간의 긴 밀월의 역사는 싹트게 되었다.
패션과 아트의 최초의 만남은 1920~30년대 파리에서 가장 성공한 디자이너인 엘자 스키야파렐리와 초현실주의자인 살바도르 달리의 만남을 예로 들 수 있다. 초현실주의를 사랑한 그녀는 달리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그의 그림을 의상에 접목하기도 했다.
나는 80년대에 신세계 갤러리에서 달리 보석전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아티스트였던 그가 보석을 디자인한 이유는 그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당시 패션 디자이너인 그녀와 아티스트였던 그 사이에는 상당한 친분과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또 하나의 성공적이었던 만남은 몇 해전 세상을 떠난 입센 로랑을 들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생전 수집해온 미술품들이 경매시장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그 어마어마한 작품들에 놀랐던 사실은 앞서 설명한 이런 관계를 잘 말해 준다.
입센 로랑은 생전 우리가 잘 아는 몬드리안의 그림과 추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그의 옷에 그대로 재현하면서 많은 찬사를 받은 디자이너로 패션과 아트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이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앞서 설명한 입센 로랑의 경우처럼 이전의 패션과 아트의 관계는 대부분 패션이 미술을 차용하는 경우가 대세였다.
패션이 미술에 먼저 손을 내밀고 그 손은 잡은 미술은 패션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는 공생관계가 기본이었지만, 최근엔 패션이 스스로 진화해가며 아트의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다. 말 그대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고 표현해도 좋다.
물론 이런 현상은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아트의 영역이 급속도로 넓어지면서 그 여건이 조성된 측면이 있다. 또한 패션뿐만 아니라 사진, 영화, 건축, 패션 등 응용미술 분야들의 가치와 대중적인 영향력이 동시에 커져감에 따라 순수미술과의 간극이 그 만큼 좁혀져 이제 영역 간 자유로운 크로스오버가 가능한 하이브리드 미술의 전개가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올 들어 국내에서도 그간 간헐적이었던 패션과 아트의 만남에 부쩍 관심이 높아졌다. 얼마 전 세계적인 브랜드 중 하나인 프라다는 건축의 거장 렘 쿨하우스와 함께 '프라다 트랜스포머'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16세기 조선시대 역사적 상징물인 경복궁 마당에 크레인을 이용해 회전이 가능한 4면체의 현대적인 건축물을 설치해 미술, 영화, 패션의 전시와 상영이 이루어졌다.
프라다 트랜스포머 이전에는 또 다른 세계적인 브랜드인 샤넬이 현재 서울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 설계를 맡은 세계적인 건축가인 자하 하디드와 함께 '샤넬 모바일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 건축물은 이름 그대로 2년 동안 세계의 7개 도시를 돌며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브랜드는 루이뷔통이다. 루이뷔통을 맡게 된 수석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인 다카시 무라카미에게 100년이 넘게 내려온 전통적인 문양들에 변화를 주문했고 그는 멀티컬러와 체리문양의 모노그램을 디자인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만든 캐릭터가 들어간 한정판 모델들은 희소성과 함께 루이뷔통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이것은 이후 많은 패션브랜드와 아티스트과의 협업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선 여러 글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이전부터 여러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을 진행해왔는데, 올해는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 아람미술관에서 패션과 아트의 '의미 있는' 만남을 위해 열리고 있는 '패션과 미술의 이유 있는 수다'라는 전시에서 나는 조각가 박승모씨, 그리고 영상작가인 한승구씨와 함께 작업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승모씨와 작업은 개인적인 친분도 이유가 있지만 그의 작업에 매료된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와 첫 만남은 아트사이트에서 있었던 첫 개인전에서였는데 작품을 보고 조각의 새로운 형태를 느끼게 되었다. 이후 패션과 조각의 만남을 이루어 보자고 의기투합해 그에게 모델을 소개했고, 의상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드레스자락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드레스를 입은 모델 조각상을 만들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해외로 판매돼 이번 전시에서는 빠지게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나는 이번 파리 컬렉션에 그의 조각을 모티브로한 의상들을 선보이기 위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가 한승구씨와는 이번 작업이 첫 만남이었다. 그는 하나의 얼굴 틀에 다양한 얼굴 이미지들을 비추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모델의 얼굴과 몸을 석고로 뜬 후 그 위에 내가 만들어 놓은 의상들을 투사하는 새로운 영역의 작업을 보여 주었다. 영상을 통해 패션이 새롭게 변하는 것, 패션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되었다.
나는 이런 공동 작업을 통해 패션이 단순한 메세나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일반 대중들이 다가서기 어려웠던 아트가 더 쉽게 많은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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