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에선 요즘 '창사 이래 가장 파격적인' 일이 잇따르고 있다. 6월말 승진 인사는 다른 공기업은 물론 민간 기업들까지도 벤치마킹을 고려할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나 볼 법한 철저한 보안 속에 하루 만에 초스피드로 승진심사를 처리, 해마다 관행처럼 되풀이돼 온 '청탁 인사' 잡음이 새어 나올 틈을 아예 원천봉쇄했기 때문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파격이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27일 LG 부회장을 지냈던 김쌍수 사장을 맞은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김 사장은 한전 역사상 최초의 민간 출신 최고경영자(CEO)다.
한전과 더불어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 등 3대 에너지 공기업이 민간 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CEO를 맞은 지 1년. 석유공사의 강영원 사장(전 대우인터내셔널 사장)이 19일 가장 먼저 취임 1주년을 맞고, 현대 출신의 주강수 가스공사 사장은 오는 10월 한 돌을 맞는다.
이들 민간 출신의 에너지 공기업 CEO 3인방은 정부가 걸고 있는 공기업 선진화 드라이브에 '+α'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에너지 공기업 CEO 3인방이 지난 1년간 조직에 시도한 체질 변화의 노력과 경영 성과를 짚어봤다. 직원들이 "이렇게 큰 변화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조직은 거침없이 흔들고 있지만, 아직 내놓을만한 경영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도 크다.
한전에는 현재 약 150개의 태스크포스 'TDR(Tear Down & Redesign)'팀들이 조직 혁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씨름 중이다. 김쌍수 사장 취임 직후 도입된 TDR은 원래는 LG혁신프로그램의 대명사. 김 사장이 친정 LG에서 TDR을 벤치마킹해 한전의 체질 변화를 이끌어낼 진원지로 삼고 있는 것이다. 화제를 모은 파격적 승진인사도 그 배후엔 TDR 활동이 있었다. TDR은 지난해에만 보고문서 50% 간소화, 변전소 컴팩트화, 노후 배전용 변압기 교체기준 개정 등의 과제를 풀어, 벌써 연간 1,117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고 있다.
'워커홀릭'으로 유명한 강 사장도 석유공사에 변화를 몰고 왔다. 강 사장 취임 이후 석유공사 직원들은 모든 업무보고를 기존에 쓰던 아래아한글과 함께 MS워드로도 작성한다. 강 사장이 해외출장 중에도 스마트폰으로 일을 처리하는 유비쿼터스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성과급에서 최대 300%까지 차이가 벌어지는, 민간기업 수준 이상의 연봉제도 도입할 계획이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분위기라 직원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전했다.
강 사장이 민간기업에서 쌓아온 해외자원 개발 및 경영의 노하우도 녹슬지는 않았다는 평가. 석유공사가 6월 스위스 석유ㆍ가스회사인 아닥스사 인수ㆍ합병(M&A) 경쟁에서 비록 중국석유화공유한회사(SINOPEC)에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M&A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조달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주 사장도 '낙하산 인사' 논란으로 출근저지 투쟁까지 갔던 노조와의 갈등을 5개월 만에 봉합하고 본격 경영의 시동을 걸고 있다. 자원 개발 분야에 오래 몸담았던 경험을 살려 지난해 12월 조직 개편을 통해 가스도입ㆍ관리 중심에서 해외자원 개발 위주로 사업의 무게 중심을 옮겼다.
그러나 이들 3인방은 민간기업 CEO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객관적인 잣대로도 높은 점수를 받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부의 공공기관 기관장 평가에서 김 사장과 강 사장은 '보통'(60점 이상~70점 미만)에 머물러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때문에 경영실적도 기대보다 저조했다. 한전의 경우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2조8,000억원의 적자를 보다가 올해 2분기에 간신히 2,336억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한전 관계자는 "대외 경영 여건이 급변해서 지난 취임 1년간의 경영 실적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측면이 있다"며 "조직 혁신과 비용 절감이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실적에도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사장이 '대형화' 목표를 앞세워 M&A에 적극 나서고 있고 주 사장도 공급선 다변화를 위해 러시아 자원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공기업 입장에서 보면 절반의 성공일 수 있겠지만 민간 입장에서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1년이었다"고 밝혔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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