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호를 푸른 벼라는 뜻으로 청도(靑稻)라 했다. 내 스스로 지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찌는 듯 무더운 여름 날씨에 농민들이 논에서 김을 매는데 뒤를 따라가며 넘어지는 모를 세울 때면(그 때 이 일을 '모 추기'라 불렀다) 농민들의 땀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푸른 벼 냄새가 무더위에 어우러져 말로 나타낼 수 없는 특이한 냄새를 내게 전달했다.
나는 평생 그 냄새를 잊을 수가 없었고 이 냄새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찾아 그렇게 지은 것이다.
나는 지금 고향 농촌에 가까운 혈육도 없고 그 당시의 마을사람들도 거의 세상을 떠났지만 한 해 몇 번씩 찾고 있다. 옛적에는 밀짚모자나 땀수건을 사가지고 가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점심 또는 저녁을 대접하거나 마을 회관 운영비를 도와드리곤 했다.
그런데 우리 농촌이 지금 죽어 가고 있다. 내가 자란 마을에는 외딴집을 포함해 30호 가까운 집이 있는데 아기 울음소리 끊긴지 오래고 학교 다니는 학생조차 한 사람도 없다. 50대가 두 세 사람 있는데 이들이 가장 젊은층이고 보통 70이 넘었다. 동네는 빈집, 1인 가정, 2인 가정이 대체로 3등분 되어 유령의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이대로 10년, 20년이 지나 그나마 지금 농촌을 지키고 있는 70대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농촌을 살려야 한다.
다른 나라 농촌은 어떤가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해외공무출장 중에도 틈만 나면 교외로 나가 프랑스·독일·미국·중국·일본·칠레 등의 농촌을 찾아보았는데 우리와 같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큰 감명을 준 곳은 프랑스였다.
나는 2003년 7월 스위스 바젤에서 국제결제은행(BIS)의 중앙은행 총재회의를 마치고 거기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 농촌 길을 가로 질러 파리까지 가서 거기서 귀국하기로 했다. 풍요로운 프랑스 농촌을 보고 싶어서였는데 당시 안성철 서독사무소장과 장병화 비서실장(현 부총재보)이 동행해 주었다.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농업 국가이며 농산물 수출규모 면에서 미국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이다. 농업생산 형태 면에서 볼 때 미국은 호당 농지면적 약 80헥타아르(1헥타아르는 3,025평)의 대규모 기업농, 한국은 호당 1헥타아르의 생계형 영세 농업인데 프랑스는 그 중간 규모인 호당 20~40헥타아르의 중규모 가족농업이다.
바젤에서 파리까지 가는 길은 끝도 없이 펼쳐진 산이 없는 농업지대였다. 여기에는 농작물과 목초가 단정하게 가꿔지고 있었는데 농촌마을에 들어가 보니 학교나 교회나 사람들이 와글와글 했다.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나는 파리에 와서 한은 직원으로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표부에 파견되어 있던 김양우(현 한은 뉴욕 사무소장) 박사에게 프랑스 농촌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부탁했는데 그 때 보내준 보고서가 나의 많은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우선 프랑스는 농업과 농촌을 보는 눈부터 다르다. 농업은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산업이라는 좁은 개념에서 벗어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환경과 국토·자연자원·관광자원 등을 보존하고 개발하는 종합산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농촌은 이러한 것을 생산하고 보존하는 곳일 뿐 아니라 비 농민들에게 쾌적한 주거와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프랑스 정부는 농업과 농촌에 대한 개발 지원정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젊은이들이 농촌을 지키고 있다.
농업인구의 연령분포를 보면 55세 미만이 70%, 그 이상이 30%이다. 농업 종사자는 전업과 겸업이 반반 이며 농민들의 업종구성을 보면 축산과 목초업이 40%, 곡물재배 18%, 포도재배 12%, 그리고 20%는 복합재배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업과 비농업은 생산성이나 생활수준 면에서 비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에서 농업종사자는 2%에 불과하지만 전 인구의 24%가 농촌에 살고 있다. 일터가 농촌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도시에 몰려 살고 있는 우리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농업과 농촌을 보는 시각부터 프랑스의 경우처럼 복합적 산업 또는 쾌적한 주거 공간의 개념으로 바꿔 거기에 상응하는 개발 지원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농촌을 빈민구제적인 미봉책으로 지원하지 말고 경쟁력 있는 산업, 그리고 쾌적한 주거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근본적인 개발 지원정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10~20 헥타아르의 중소규모형 농업을 모델로 하여 규모경제의 실현, 농업생산의 다각화, 고생산성 확보를 위한 기술개발과 경영혁신을 추진하고 규제를 풀어서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자본의 농촌진입을 적극 유도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서산농장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농촌에 대한 레저·관광·농업생산 등의 종합개발에 기업자본이 참여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그리고 농촌의 개발과 구조조정, 그리고 농촌을 쾌적한 주거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과감하고 지속적인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있어야 한다.
농촌 거주자들에게 교육소외가 없어야 하고 농촌거주자의 생활편익과 문화편익 그리고 의료편익 등이 보장되도록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비농업과 도시인을 위해 농촌이 희생해 왔다면 이제 비농업과 도시인들이 농촌을 위해 부담을 져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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