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드라마는 한국의 시청률이 가장 높지 않았을까 싶다. 지루한 북핵 게임의 고비마다 유난스레 소란을 피운 과거가 되풀이된 느낌이었다. 드라마든 스포츠 게임이든 관객이 더 쉽게 들뜨는 법이다. 그러나 현실의 외교 드라마, 전략적 게임의 실체는 냉정하게 헤아려야 한다. 미국 외교의 마이스터, 헨리 키신저는 그제 "분위기와 실체를 혼동해 샛길로 빠져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물색없이 떠들다 머쓱해진 경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천박한 "국민은 개 값" 비난
우리 전문가들은 북미 대화 무드에서 우리만 소외될 수 있다고 앞 다퉈 경고한다. 또 미국은 여기자 둘을 구하기 위해 전직 대통령까지 나섰는데, 우리 정부는 억류된 개성공단 근로자의 소식조차 모른다고 비난한다. "국민 값이 개 값만 못하냐"고 분개한 논객도 있다. 천박한 비유의 정체가 도무지 아리송하다.
외국 언론은 '빌과 힐러리 쇼'의 진짜 스타는 김정일이라고 논평했다. 클린턴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대북 게임에서 가장 난감한 현안인 인질구출을 위해 특사 임무를 기꺼이 수행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오랜 핵 게임 맞수가 뒤늦게 자신을 찾아와 고개 숙이는 드라마를 연출, 마침내 게임에서 승리한 듯한 인식을 북한 주민에게 심는 선전효과를 누렸다. 그래서 '8월의 크리스마스'이다.
이런 형국은 오바마 정부가 대북제재 고삐를 늦추고 대화로 돌아섰다는 관측을 낳았다. 북한도 클린턴이 오바마의 대화 메시지를 전하고, 북미 현안을 폭 넓게 논의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곧장 국면 전환의 조짐으로 보는 것은 성급한 느낌이다.
김 위원장은 미국과 관계개선을 본격 협상하는 듯한 모습을 대내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대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그의 '스타 행세'를 계속 도울 이유는 없다. 일각에서는 미국은 북한체제의 불안이 전략적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김정일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고 분석하지만, 이런 난해한 진단보다는 인질 걸림돌을 제거한 미국은 제재와 압박을 강화할 것이라는 예상이 한결 자연스럽다. 키신저와 미국 언론도 6자회담 틀과 비핵화 원칙을 고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비춰 미국은 대치와 봉쇄 속에 북한의 근본적 변화 여부를 신중하게 타진하는 '긴 게임(long game)'을 계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미국은 냉전시대에도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등에서 자세를 낮춰 인질을 구했다. 이런 관행이 외교정책 기조를 훼손한 흔적은 없다. '활짝 웃는 김정일과 굳은 표정의 클린턴'에 주목한 전문가는 클린턴 방북을 '외교 카메오' 출연에 비유했다. 인질구출을 위해 김정일의 선전수단 노릇을 감수했지만, 나라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임무에 충실했다는 평가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북미 대치상황의 반전 여부는 클린턴 방북이 아닌 북한의 태도 변화에 달렸다.
이런 진단이 크게 그르지 않다면, 우리도 서둘러 북한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주장은 북미가 주역인 핵 게임의 현실을 애써 간과한 인상이 짙다. 불과 몇 달 전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사실상의 '핵 보유'를 건성 나무란 게 아니라면, 북한에 앞서 우리 정부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사리에도 어긋난다.
북미ㆍ남북에 다른 게임 논리
억류 근로자 석방을 위해 무작정 미국을 본받으라고 외치는 이들은 진정한 속마음이 궁금하다. 북한에 어떤 대가라도 치를 만큼 우리 사회가 너그러운지 의문이다. 남북 화해와 협력을 이끌고 국민의 안위를 돌보는 책임은 어느 정부든 짊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북한에게 우리는 애초 미국과는 아주 다른 게임 목표와 논리를 적용하는 상대이다. 이를테면 전직 대통령 방북과 대화 제의만으로 큰 선물이 될 수 없는 관계다. 이 엄연한 현실을 클린턴의 드라마 쇼와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부를 욕하느라 멋대로 각본을 쓰는 것은 더욱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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