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을 듣고 쓰는 일이 잦아졌다. 통섭은 19세기 과학사학자 윌리엄 휴얼이 '더불어 넘나들다'는 뜻으로 만든 개념어인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학문 간 대통합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21세기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정보처리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연구 방법의 혁신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학자들의 오랜 꿈으로 남아있던 지식의 대통합이 가능한 미래로 다가왔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이론의 소통과 융합은 이제 세계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대세로 인식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는 정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갈등으로 통섭이 쟁점이 됐다. 한예종이 추진하던 'U-AT 통섭교육사업'이 정부의 반대로 좌초하면서 황지우 전 총장을 비롯한 한예종 교수 등이 경질되는 사태를 빚은 것이다.
한예종 미래준비교육단장으로 이 사업을 준비했던 심광현(52) 영상이론과 교수가 마침 통섭의 방향을 제시하는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문화과학사 발행)를 펴냈다. 정부의 중징계 처분을 기다리고 있기도 한 심 교수는 인터뷰에서 "비환원주의적이며 수평적인 통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비쿼터스>
- 유비쿼터스는 기술적ㆍ도구적 측면이 강한 반면 통섭은 학문 담론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둘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유비쿼터스는 SF영화 속에서 가능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센서가 부착된 안경, 옷 등의 등장으로 일상이 컴퓨터의 제어 대상이 됐다. 생체칩을 삽입해 내장의 박동 상태를 컴퓨터로 관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적ㆍ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것들이 컴퓨터를 매개로 통합되는 것이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뇌과학이 철학과 맞물리고, 사회생물학에 윤리학이 스며들고 있다. 하기 싫어도 통섭이 돼 가는 것이다."
- '제3공간의 출현'이라고 표현한 유비쿼터스의 사회상은 유토피아적 측면과 디스토피아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제1차 정보화 혁명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정보화ㆍ자동화가 신자유주의와 맞물리면서 고용 축소, 금융세계화, 양극화 등을 낳았다. 유비쿼터스 혁명도 제1차 정보화 혁명과 마찬가지로 자본과 권력의 필요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그런데 유비쿼터스 혁명은 종래의 양극화 위험에 더해 '통제'와 '인간 배제'라는 가공할 위험성까지 안고 있다. 통섭 담론은 사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기술 본위의 환원주의적 융복합 흐름이 갖고 있는 이런 측면에 대한 비판도 포괄해야 한다."
- 환원주의적 통섭과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리적 인과 법칙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사회과학과 인문학뿐 아니라 예술의 원리도 종국엔 자연과학으로 통합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통섭의 관점은 유비쿼터스의 디스토피아를 막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킬 것이다.
반대로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모든 지식과 경험체계에 수평적 가치를 부여한다. '기술과학에 의한 사회의 구성'뿐 아니라 '사회에 의한 기술과학의 재구성'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올바른 통섭의 방향은, 비트겐슈타인의 설명 구조를 빌리자면, 부분적인 유사성이 중첩된 '가족적 유사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치 각기 고유한 색채와 모양을 지닌 다섯 원이 부분적으로 겹쳐 하나를 이루는 오륜기와 같은 구조일 것이다."
- 통섭의 '엔진' 역할을 철학이나 자연과학이 아니라 예술에서 찾는 이유는.
"칸트의 철학체계에 빗대 설명하자면 제1비판서(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과학, 제2비판서(실천이성비판)의 주제는 사회과학으로 분화ㆍ발전했다. 그 둘의 직접적인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제3비판서(판단력비판)의 주제인 아름다움은 둘을 포괄할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 이질적인 것들을 접속해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상상력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이다."
- 통섭의 관점에서 현 정부의 교육정책, 학문정책을 평가하자면.
"지금 진행 중인 통섭은 철저히 기술공학 중심의 환원주의적 통섭이다. 더구나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만한 것에만 치중돼 있다. 카이스트의 통섭 대학원은 놔두면서 한예종의 통섭 교육을 없애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균형적으로 융합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낡은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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