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은 참 알 수 없다. 3월 17일 새벽 미국 케이블방송 커런트TV 소속 두 여기자가 좀 경솔하게 두만강 상류 북중 경계를 넘어 들어간 것은 북한체제의 아킬레스건인 탈북자와 북한 인권문제 현장을 생생한 화면에 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북한 국경수비대에 붙잡히지만 않았더라면 김정일 정권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두 여기자는 석 달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게 되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을 맞아 회담과 만찬을 함께 한 3시간 15분은 김 위원장이 건강과 체제 장악 면에서 전혀 이상이 없음을 대내외에 과시한 큰 이벤트였다. 미국의 인도적 요구를 들어주고 이미지를 개선함으로써 유엔안보리 결의 1874호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의 제재압박에서도 한숨을 돌리는 효과도 봤다. 오바마 행정부는 거듭 여기자 석방과 북핵 제재문제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고 강조하지만 북한측이 애타게 바라던 북미대화의 재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국제사회가 그토록 말렸던 장거리 로켓발사를 강행하고 2차 핵실험까지 한 김 위원장에게 이렇게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간 일이 생긴 것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운 좋게 김 위원장이 거둔 성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 위원장의 건강 악화에 근거를 둔 1년 이내 사망설이나 김정일 체제의 조기붕괴론도 상당기간 잠잠해질 수밖에 없다. 싫든 좋든 건재한 김 위원장을 상대로 북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김 위원장의 건재를 뜨악하게만 여길 일도 아니다. 지난해 8월 김 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와병은 북한이 대남관계를 포함한 대외관계에서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된 주요 배경이 되었다. 철저히 김 위원장 1인 리더십에 의존해온 북한체제는 김 위원장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대내외적으로 경직될 수밖에 없다. 미국 등 국제사회를 상대로 핵을 포기하는 대신 체제 보장과 경제 지원을 제공받는 복잡한 게임을 벌이기보다는 핵 보유로 체제를 지키자는 쪽을 택하기가 쉽다. 바로 북한에서 지난 1년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점에서 김 위원장이 건강을 웬만큼 회복한 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이제 세계의 관심은 건강과 함께 자신감을 회복한 김 위원장이 보여줄 다음 수순에 모아지고 있다. 그가 바랄 수 있는 최대의 목표는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사실상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북미수교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번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불러들여 거둔 성공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자 석방 후 오바마 행정부가 보이고 있는 자세나 주변국의 정세로 미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무리를 해서 핵 보유를 고집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이 체제 유지 수단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빈곤과 국제적 고립 심화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핵 포기와 체제 보장 및 경제 지원을 맞바꾸는 협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6자회담 재개냐 북미 양자회담이냐, 행동 대 행동의 단계적 접근이냐 포괄적 패키지 방식이냐를 놓고 샅바싸움이 벌어질 수는 있지만 협상의 핵심은 달라지기 어렵다.
시간은 김 위원장의 편이 아니다. 그가 건강을 다소 회복했다 하더라도 자연적 수명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주어질지 모를 시간 내에 김 위원장은 확실한 성과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그가 걱정하는 후계체제를 튼튼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과 한국 등 주변국의 접근 방식도 중요하다. 모처럼 국제사회에서 위신을 세운 김 위원장이 결정적으로 핵 포기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확고한 신뢰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우연히 한반도 핵 게임 드라마에 뛰어든 미국 두 여기자 문제의 해피 엔딩은 그러한 신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ㆍ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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