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는 농촌 마을에서 작은 이발관을 차려놓고 푼돈을 벌며 근근이 지냈습니다. 손님은 모두 동네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에 막내인 나는 부엌일을 했지요.
아버지 성함은 류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발하러 오는 아저씨들은 “어이, 시인 있는가? 내 머리 좀 깎아주게”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님은 “예, 형님, 어서 오이소. 희야, 부엌에서 따신 물 좀 데워라”고 했고, 손님 아저씨는 머리를 깎기 위해 작은 나무의자에 앉았습니다.
손님은 “좀 짧게 깎아주게”라고 말하곤 했지요. 이발을 가능한 드물게 해서 돈을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습관적으로 손님의 머리를 시원하게, 짧게 밀어 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손님의 머리가 볼품이 없어집니다.
한 번은 젊은 아저씨가 왔는데, 아버지는 평소 습관대로 이 남자도 그렇게 깎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아저씨는 여느 손님과 달랐습니다. 이 아저씨는 이발이 끝나고 나서 거울을 보더니 아주 실망했습니다. 이 아저씨는 기분이 나빠 투덜대며 이발관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거들어주던 오빠가 말했습니다.
“아부지, 젊은 사람은 그렇게 짧게 깎으면 싫어해요. 요즘 저렇게 짧은 머리하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제 앞으로 젊은 사람이 오면 저한테 맡기소. 나이 많은 사람이 오면 아부지가 깎으소.”
그날 이후부터 아버지는 오빠 말대로 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은 아버지가, 젊은 사람은 오빠가 맡았습니다. 한 번은 제 머리를 아버지가 깎았는데, 정말 너무 짧게 깎아서 거울을 보니 너무 이상했습니다. 부끄러워서 학교에 갈 때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갔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보더니 “보자기를 왜 쓰는데?”하면서 보자기를 벗겼고, 제 머리 스타일을 본 친구들은 깔깔 웃었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오빠는 “아부지, 저는 서울로 가서 다른 직업을 구해볼 생각입니다. 이발간은 아부지 혼자 하이소”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걱정이 돼서 “니 혼자서 서울에 가서 어떻게 살라고?”하면서 처음에는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고 말했지요.
오빠는 서울로 떠났습니다. 한 동안 소식이 없자 아버지는 애가 탔습니다.
“이놈이 서울로 가더니 편지도 없노?”
그러던 중, 우체부 아저씨가 오더니 “편지요~”하며 우편물을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님 전 상서, 아버님 그간 기채일향만강하시며, 무고하신지요? 저는 지금 잘 있습니다. 이발간에 취직했습니다.”
아버지는 “배운 도둑질 못 버린다더니 할 수 없던 모양이다. 하하 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아버지께서 궁금해 하던 중 편지가 또 왔습니다.
“아버님 전 상서, 아부지 진작 편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이발관에서 나왔고, 스텐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이 소식에 아버지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이놈이 지 살 궁리는 하고 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또 몇 개월이 흘렀습니다. 또 “편지요~”하는 우체부 아저씨의 말과 함께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부지, 저는 이제 스텐공장은 그만두고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표정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아버지한테는 아들이 유일한 희망이고, 소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소식을 기다리는 것에 지쳤는지 아들한테 직접 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희야, 너 시집 가거라. 나는 니 오빠 보러 서울로 갈란다. 서울 구경도 하고, 청와대도 한 번 가보고, 창경원도 한번 가보고 싶구나.”
우리 집은 그 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빠가 결혼을 했고, 저도 아버지 성화에 시집을 갔지요. 아버지는 소원대로 서울로 가시고, 오빠와 새 언니는 홀시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을 무렵 아버지에게 치매가 왔습니다. 오빠는 명심보감과 천자문 책을 챙겨와 “아버지, 이거 읽으시고 아무데도 나가지 마이소”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오냐, 돈 많이 벌어 온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했지만, 아버지는 자주 집을 나갔고, 길을 헤매고 다니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빠는 경찰서나 시립병원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슬프게도 비가 많이 왔던 6월 15일 날 아버지는 다시 집을 나가셨는데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홍수에 쓸려간 사람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요즘은 저도 시각 장애인이 되어서 4월부터 점자를 배우?있습니다. 비가 오니 아버지 생각이 더욱 납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 류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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