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인헌동 주민센터별관 2층의 '관악 녹색가게 1호점'. 50㎡ 남짓한 공간에 수백 벌의 옷이 옷걸이에 걸려있고 신발, 참고서, 장난감 등 갖가지 물품이 벽을 둘러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주민들이 버리기 아까운 생활용품들을 기부하거나 서로 교환하는 재사용센터다. 여느 때 같으면 아이 옷을 고르기 바빴을 주민들은 그러나 이날 대여섯명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구 문에 붙은 포스터에는 '녹색가게를 지켜주세요'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주부 양모 (57)씨는 "녹색가게가 좋아 버스까지 타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들렀는데, 내년부터 없어진다 해서 걱정이다"며 "구청이 이런 곳을 더 늘려도 모자랄 판인데 도리어 쫓아낸다고 하니까 어이없다"고 말했다.
주민들끼리 헌옷이나 헌책 등을 교환하는 재사용 가게를 구청이 석연찮은 이유로 주민센터에서 쫓아내려 해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주민들은 "주민 모임이 비리 구청장 퇴진 운동을 벌인 데 대한 보복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관악주민연대가 운영하는 '관악 녹색가게 1호점'은 2003년부터 인헌동 주민센터에 입주해 하루에만 50~60명, 월 평균 1,000여명의 주민이 이용하는 관악구 주민들의 '벼룩시장'이다. 등록된 주민 회원만 850여명이다. 이 가게의 활성화 덕택으로 관악구는 2006년 주민자치센터 운영 종합평가에서도 우수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관악구청은 그러나 최근 인헌동 주민센터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신축 건물 설계에서 녹색가게에는 공간을 배정하지 않기로 했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수업 형태로 일시적으로 진행되는 다른 주민 자치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녹색가게는 상시 개설해야 하는데 새 건물에는 그 만한 공간이 없어 장소를 따로 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년 초 주민센터에 대한 재건축 공사가 시작되면 재정이 넉넉지 못한 녹색가게로선 영락없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관악구의 이 같은 결정은 각 구청들이 최근 주민들이 모여 만든 생활협동조합이나 육아방, 공부방 등 자치활동을 앞 다퉈 지원하는 추이를 거스르는 것이다.
녹색가게운동협의회가 각 지역 모임을 주축으로 해서 전국 36곳에서 운영하는 녹색가게의 경우도 주민자치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아 각 지자체들이 주민센터나 복지관에 공간을 배정하는 등 적극 유치하고 있다. 양천구청은 아예 건물까지 따로 지어 녹색가게를 지원하고 있다.
관악구청의 '거꾸로 행정'은 결국 녹색가게를 운영하는 주민모임이 구청장 퇴진운동을 벌인 데 대한 앙갚음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주민들의 주장이다.
김효겸 관악구청장이 올해 초 부하직원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는 등 각종 비리혐의가 알려지자 관악주민연대가 12개 시민단체와 함께 구청장 퇴진 운동에 나섰던 것이 구청의 보복을 불렀다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지난 5월 1심 재판에서 뇌물 수수혐의가 인정돼 구청장 직무가 정지됐고, 최근에는 사전선거운동 혐의까지 인정돼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현재 부구청장이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녹색가게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은 지난달 초부터 가게 살리기를 위한 서명운동에 돌입해 주민 1,000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주민연대 관계자는 "구청이 각종 비리로 얼룩진 것도 모자라서 어처구니 없게도 주민 자치활동에 대해서까지 보복을 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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