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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방문판매 뷰티 컨설턴트 김미순·염서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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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방문판매 뷰티 컨설턴트 김미순·염서온씨

입력
2009.08.0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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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보자. 나른한 오후 엄마를 찾아온 낯선 손님이 있다. 두툼한 검은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수다가 하릴없이 이어진다. 남편 험담, 자식 자랑, 출처를 알길 없는 소문과 시시콜콜한 세상뉴스까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대개는 엄마를 한껏 추켜세우고 한 구비를 넘어간다. "어머, 아들이 엄마를 닮아서 공부를 잘 하나 봐요""사모님, 피부가 넘 좋으시다" 하는 식이다.

가뜩이나 무료했던 엄마의 기분이 풍선을 탈 무렵, 스르르 좌판이 깔린다. 피부에 좋다는 온갖 크림과 도구가 방 한 귀퉁이를 점령하면 엄마는 기계적으로 베개를 깔고 눕는다. 말의 성찬에 이은 얼굴 마사지 서비스. 그리고 나면 어느새 화장대 위에는 엄마가 구입한 온갖 화장품 세트가 즐비하게 놓여 있곤 했다.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도 그랬으리라. 불쑥 찾아온 보부상이 동동구루무를 비롯해 백분 연분 호분 등 분첩 따위를 보따리에서 불러낼라치면 이야기 보따리도 함께 풀리기 마련이다. 여성의 탐미(耽美)를 자극하는 화장품 장사들은 샘플 외에도 무릇 살가운 관심과 달짝지근한 말의 향연을 덤으로 끼워 팔았다.

욕망은 청명하나 심산(心算)은 시간의 더께가 앉기 마련. 세월이 수상하다 보니 불신과 강퍅한 심리가 똬리를 트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가가호호 방문 장사가 더 힘들어지면서 판촉 묘수도 더욱 필요하게 됐다. '보부상→화장품 아줌마→방문판매원→뷰티(Beauty) 컨설턴트'로 이어지는 명칭의 변화도 이런 연유다.

글로벌 화장품업체 메리케이의 뷰티 컨설턴트(정확히는 한단계 높은 세일즈 디렉터)인 김미순(활동무대 광주) 염서온(제주)씨를 만났다. 둘은 실적이 탁월한 이들만 제공 받는다는 '핑크 카'(Pink Car)의 주인이기도 하다.

-문전박대는 안 당하나.

김: "'메리케이' 하면 어느 집 개 이름이냐고 되묻는다. 보따리 장사라고 상대도 안 해주고…. 요즘 분들은 낯선 자, 특히 뭔가 팔려는 이가 방문하면 '안 사야지'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있다." 염 씨가 "우리도 방판의 고객이었을 땐 재료 같은 게 의심스럽긴 했다"고 거든다.

-그래도 팔아야 하는 숙명인데.

염: "전문가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꼭 제복을 갖춰 입고 나간다. 들고 다니는 가방만 서너 개다. 사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가정방문을 꺼리면 사무실로 오게 한다. 오기까지가 힘들지 일단 사무실에 들이면 100% 산다."

베이지 색 제복은 자못 엄정하다. 성과(등급과 수상경력 등)를 기리는 각종 배지가 훈장처럼 달려있다. 가끔 여군 혹은 스튜어디스로 오해 받지만 잔뜩 경계하는 고객의 무장해제 용으론 효과가 있단다.

김: "가격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는다. 마사지도 안 해준다. 철저히 '노 터치'(No Touch)다. 화장품이 아니라 각자에 맞는 피부관리법을 설명할 뿐인데 오히려 손님들이 제품을 달라고 한다."

화장품 방판의 대명사인 마사지를 거르니 베개 깔고 누운 몸이 머쓱할 텐데, 값도 안 부르고 제품자랑도 안하고 맞춤식 피부관리 요령만 설명하니 솔깃할 수 밖에. 속보이는 강매분위기에서 은근한 판매유도로 바뀐 셈이라 했더니, "타인에 의한 마사지에서 자기관리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애써 의미부여를 한다.

-말이라도 통하려면 일단 뚫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김: "교사가 주요 타깃이다. 그것도 딱 한 명만 집중 공략한다. 100% 만족시키면 입 소문을 타고 굴비 엮듯 손님이 줄줄이 이어진다. 한번 만나면 영원한 고객이다. 계속 찾아가고 연락한다. 그랬더니 3년 전에 3만원짜리 로션 하나 샀던 손님이 어느 날 40만원 대 고객이 돼 있었다. 결국 인내 싸움이다."

염: "종종 은행 대출상담을 활용하는데, 친해지기 위해 꾸준히 간다. 예컨대 은행원이 카드가입을 부탁하면 들어준다. 감사표시로 내 일에 관심을 보이면 샘플을 갖다 주고, 피부관리법을 알려주고, 그러다 화장품을 사게 되고, 동료를 추천해주고 순으로 진행된다."

다만 화장품 방판의 노다지로 불리는 탓에 온갖 방판업자가 꼬이는 미용실은 최대 격전지라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가급적 피한다고 한다.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은 모양이다.

영업에 왕도가 있으랴. 쉬지 않고 고객을 찾아가 관계를 쌓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게 기본이자 전부인 것을. 그러나 말이 쉽지 "반품해 달라고 화장품을 냅다 집어 던지는 손님도 있고"(김), "세상의 선입견이 살아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고역"이라고 털어놓는 이면도 있다.

어쩌다 이 직업과 연을 맺었는지가 궁금했다. 돈이 그리 궁했을까. 둘의 이력은 화려하다 못해 놀랍다. "월 순익 1,500만원에 빛나는 옷 가게 사장"(김), "'이대(무용과) 나온 여자'에 모델 배우 방송리포터로 활약하며 한때 대접 받던 사람"(염)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쉬웠을까.

김: "옷 가게는 재고가 쌓이면 스트레스 제대로 받죠, 물건 떼러 꼭두새벽부터 설쳐야 하죠. 섬유먼지 때문에 건강도 상하고 손님 맞느라 아이들 밥도 굶기죠. 근데 방판은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제가 여유 있는 시간에 직접 고객을 찾아가면 되잖아요. 덤으로 피부도 고와지고."(웃음)

염: "처음엔 영업을 어찌하나 했죠. 그런데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잖아요, 저도 그렇고. 그걸 공략하면 되겠다 싶었죠. 그간 백화점을 섭렵하면서 투자했던 경험이 도움도 됐고요. 무엇보다 몸을 안 움직이면 수입이 제로니까 자극이 됐죠."

이들의 수입은 보통 월 400만~800만원 정도(잘 버는 축에 속한다). 이제 돈은 큰 목적이 아니란다. "이 잡듯 고객을 뒤지다 보니 무슨 일을 당하면 와줄 친구가 전국에 포진해있다"(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고객과 말을 틀 양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자기개발이 되더라"(염)는 게 자랑거리다.

사실 자부심이 도를 넘긴 했다. 말끝마다 '메리케이' 자랑이다. 면박을 줬더니 "우린 미쳤다"고 웃는다.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성공할 수 있으랴. 엄마가 일에 미쳤더니 아이들은 공부에 미쳤단다.

혹여 방판이 초인종을 누르거든 베개는 깔지 마시라. 자칫 구식으로 오해 받는다. 마사지 안 해주는 게 요즘 대세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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