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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경제학자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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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경제학자의 상상력

입력
2009.08.02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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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점과 정도, 심각성을 예견해 사전에 저지하지 못한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내외적으로 머리좋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시스템에 내재한 위험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집단적 상상력(collective imagination)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이런 내용의 3쪽짜리 서한을 보냈다고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 자매지인 옵저버가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여왕이 런던 정경대학(LSE)을 방문해 "왜 아무도 금융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했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학계의 공식 답변이다.

▦ 올 6월 영국학술원 주최 세미나에서 논의된 내용에 기초해 작성된 이 편지는 먼저 "장기간의 저금리 추세가 만든 환상이 중국과 중동 산유국에게서 빌린 돈으로 소비하는 미국 등 세계경제의 수면 아래서 얼마나 나쁜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글로벌 불균형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제로로 만들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을 찾았다고 떠드는 '금융 마법사들(financial wizards)'의 꼬드김에 넘어갔다"고 자책했다. 오만과 과신에 근거한 이 같은 낙관적 전망은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 영란은행의 통화정책위원인 팀 베슬리 등이 주도한 이번 서한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나 통렬한 학계의 반성이 담긴 것은 아니다. 언론의 눈길도 별로 끌지 못했다. 하지만 여왕이 세계적 명성의 대학에서 짓궂게 문제를 제기하고, 명망 있는 학자와 전문가 그룹이 예의와 성의를 갖춰 답변한 과정이 재미있다. "여왕 폐하, 이것이 우리가 금융위기 발생을 방치한 경위입니다…"라는 신문 표제에선 영국 특유의 익살과 유머도 잔뜩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두뇌집단의 집단적 상상력 실패를 솔직히 사과함으로써 학계의 책임을 비켜가지 않았다.

▦ 6월 초 전미경제연구소(AIER)는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도덕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소신을 저버렸던 경험을 고백하는" 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사회적 명성이나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태도를 취했던 '죄'를 털어놓아보라는 것이다. 얕고 짧은 소견으로 세상일을 다 아는 척하고 이리저리 둘러대는 기술에 능한 경제학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요구한 기획이다. 우리도 누군가 이런 기획을 해보거나 경제학자들에게 상상력 부족을 따져 물었으면 좋겠다. 위기를 맞을 때나 벗어날 때나 재빠르게 시류에 편승하는 주장과 행태가 무성해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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