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오후 충북 청주시 석교동의 육거리시장 골목. 평소처럼 시장통은 시끌벅적한데 상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부침개 반쪽도 나눠 먹던 사이인데… 이러면 천벌 받지." 생선에 소금을 뿌리던 노점상 김모(68ㆍ여)씨는 상인들 돈을 마구 끌어 쓰고 도망 간 유모(60ㆍ여)씨 얘기가 나오자 가슴을 쳤다.
"길바닥에서 40년 장사해서 모은 걸 몽땅 날렸으니 이제 무슨 희망으로 산답니까?" 유씨와 친구처럼 지낸 A(59ㆍ여)씨는 "돈 떼인 것도 억울하지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더 가슴 아프다"고 했다.
청주 육거리시장은 3,500여명의 상인이 하루 3만명의 손님을 상대로 7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부권 최대 재래시장. 일제 때 명맥이 끊긴 전통 민속놀이 '남석교 지신밟기'를 이곳 상인들이 똘똘 뭉쳐 되살렸을 정도로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전국 최초로 재래시장 상품권을 발행하고, 스스로 '상인대학'을 열어 친절ㆍ마케팅ㆍ정보화 교육까지 하면서 대형마트의 무차별 '공세'를 이겨냈다.
꿋꿋하게 시장통을 지켜온 사람들은 지난 21일 유씨가 잠적하면서 깊은 시름에 빠졌다. 청과상을 하던 유씨는 평소처럼 새벽에 나와 장사를 하다가 오전 11시께 "작은 어머니 병문안 간다"며 자리를 떴다.
"가게 문도 안 닫고, 입던 옷 그대로 가길래 바로 올 줄 알았지." 그러나 유씨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날 저녁 그의 가게를 인수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상인들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유씨에게 곗돈 형식으로 돈을 맡겼거나 빌려준 사람은 줄잡아 100여명. 일인당 수 백만원에서 수 천만원까지 총 피해액은 현재 확인된 것만 10억여원. 피해자 대부분은 골목에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60, 70대 노점상들이다.
한 70대 할머니는 평생 야채장사를 해 모은 8,000만원을 유씨에게 통장째 맡겼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명절 때도 장사를 했던 할머니는 며칠째 시장에 나오지 않고 있다.
유씨는 30여년 전 육거리시장에서 좌판을 시작해 10여년 전 점포를 열었다. 성실하고 침착한데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아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런 평판에 힘입어 유씨는 수년 전부터 계를 꾸려 거액의 돈을 굴리다 사고를 낸 것이다.
피해 사례가 속속 드러나면서 '사람냄새 나는' 시장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잡화상을 하는 B(57ㆍ여)씨는 "내 돈도 내 돈이지만 소개한 이웃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어 하루종일 가게에 처박혀 지낸다"고 말했다. 2,000여만원을 떼인 C(68ㆍ여)씨는 "노후를 위해 아이들 몰래 저축해 놓았던 돈이라 하소연할 데도 없고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이들이 돈을 되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유씨를 고소하려고 해도 피해자들 대부분이 차용증을 제대로 받아놓지 않아 이마저도 쉽지 않다. 차용증을 갖고 있는 9명도 채권금액과 변제기일 등을 제대로 명기한 차용증은 2건 뿐이다.
상인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도우러 나선 정해봉법무사 사무실의 유희창(40) 사무장은 "고소장을 내더라도 대다수 피해자들이 돈을 빌려준 증빙 자료가 없어 법적 구제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육거리시장상인연합회 최경호(51) 회장은 "가뜩이나 대형마트의 무차별 영업 확장으로 힘든 때에 생각지도 못한 일까지 터져 상인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육거리 사람들이 이 위기를 잘 이겨내고 예전의 정겨운 풍경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청주=한덕동 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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