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없이 땅을 파내려 갔습니다 꽃삽을 들고. 나는 달고 맛있는 꿈을 꾸었죠(1980-)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달고 맛있는 건 참 많구나, 나는 이름들을 기억하느라 머리가 아팠죠(1987-) 오늘 밤은, 두통 속에서 어느덧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 처음으로, 텅 빈 집터로 다시 돌아왔습니다(1994~) 스물다섯, 눈을 조금 떴고 귀가 먹었죠,
침묵을 모르는 여자의 순간적인 침묵처럼(1997-)
오늘 밤은, 남자도 없는 방에서 느릿느릿 짐을 꾸리는 여자처럼(1999-굿바이) 머리칼을 씹었죠 검은 물이 쪽 빠지도록, 엄마도, 누이도 모두 떠나간 텅 빈 집터에서 방과 방을 오갔죠(2000-) 빽빽한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어디선가, 안녕하시오 황 선생! 나는 놀랐습니다 귀머거리 주제에(2004) 잘 가 잘 가시오! 흰 머리칼을 우물거리며
서른 다섯, 쾌종 쾌종 쾌종 겨울이 다 가도록 오늘 밤은, 두리번 두리번거렸죠
● '어린이_행진곡'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1970년에 태어난 시인 황병승의 열살부터 서른 다섯살까지 자서전을 보는 것 같다. 이십 오년, 세월의 자취를 어린이 행진곡으로 명명하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일까?
밤낮없이 땅을 팠고(꽃삽으로!) 어느 순간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달고 맛있는 건" 많다는 생각이 들 때 지상의 표면을 걸어가면서 어른이 되기는 처음부터 빗나간 일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시간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는가.
식구와 이별을 하고(그것도 모계의 식구와!) 집이 사라진 공터에서 '방과 방을' 오가면서 어색하게 어른으로 떠밀려가는 한 귀머거리 인간. 이미 유년이 끝나고도 어린이 행진곡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세계는 "안녕하시오 황 선생!"이라고 인사한다.
이 어색한 마주침, 이 불편한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린이 행진곡에 맞추어 계속 두리번거리는 건 아닐까?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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