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말 군복무를 마친 나는 다음해 복학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전념키로 작심한 터라 학과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힘을 구축하느냐가 문제였다.
그 동안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많이 고민해온 터라 목표와 전략을 구상해 왔으나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남북분단 상태에서 이념대립을 이용한 탄압이 원체 강해 사회주의를 연상시키는 말 한마디만 들어가도 '북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세력' 내지 '북괴를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념'이나 '사상' 또는 '전략'이란 말만 써도 사회주의자로 의심 받던 시대였다.
아무튼 정치후진국, 곧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봉쇄되어 있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이 취약한 나라에서는 군대와 대학이 가장 큰 정치적 힘을 갖는다.
군사쿠데타를 통한 '군사혁명'이든가, 학생운동 중심의 민중봉기를 통한 민주화가 아니고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과는 판이한 상황이었다. 나는 일단 학생운동에 주력해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주력키로 했다.
1970년대의 서울법대 학생운동은 대단히 활발했다.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학생운동가들이 많았다. 그 당시 현안이었던 제적생 복학 문제는 학생회간부들이 대처했기에 나는 학생들의 사회정치의식을 높이고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조직할 방안을 모색했다.
그래서 사회법학회 후배들과 함께 학생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면서 각 대학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클들과 교류하는 일에 주력했다. 문리대의 문우회, 상대의 한사와 이경회, 고려대의 한맥과 한사연, 연세대의 한문연, 경북대의 정진회 등과 토론회나 수련회를 통해 교류했다. 1970년 말부터는 수많은 대학의 학생들과 교류했고, 그 일로 광화문 일대의 다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1970년 4월19일, 4ㆍ19혁명 10주년을 맞아 학생회 주최의 강연회가 열렸다. 연사는 함석헌선생과 4ㆍ19 선언문 기초자 이수정(한국일보 기자), 그리고 나였다. 복학한지 얼마 안 되고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은 내가 연사가 된 건 의외였다. 나는 복학하자마자 학생들에게 '돌아온 역전의 용사' 쯤으로 인식된 것 같았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준비하던 때라 당연히 이를 규탄하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당시 학생운동권에 회자되던 중국식 농촌 중심 '도시포위전략'의 비현실성과 근로대중의 조직화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특히 지식인의 언행일치와 영웅심 배격을 강조했다. 그만큼 순수했던 것일까?
1학기 말쯤 제적생 복학을 요구하는 학생총회에서 학교 당국의 약속 위반과 교수들의 무성의한 태도를 성토하는 가운데 내가 '일제시대 지주의 아들로 독립운동은 외면한 채 동경으로 유학 갔던 사람들이 무슨 정의감이 있겠느냐'고 몰아붙이자 교수들이 나를 제적하겠다며 야단을 쳤다.
나도 "이런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며 학교에서 나와 길 건너 다방에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얼마 후 사회법학회 후배인 전광희가 찾아와 "학장님이 형을 데리고 오라 한다"면서 기어이 학장실로 끌고 갔다.
학장실에 갔더니 학장을 비롯해 교수와 학생 30여명으로 꽉 차 있었다. 서모 학장님과 김모 학생과장님의 훈계를 들었다. 법대는 평소 교수와 학생 간에 친분이 두터워 사적으로는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최문환 총장이 학장실로 들이닥쳤다. 들어서자마자 "장기표란 놈 어디 있어. 당장 퇴학시켜"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총장은 곧바로 돌아가셨다. 최문환 총장은 '민족주의의 전개과정'이란 책으로 유명했는데, 성질이 급한 분 같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지주' 발언의 동기를 조사받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교수들은 우리들의 주장이 다 맞는다면서도 '자네들도 어른이 되면 우리들 심정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다짐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젊은 사람들에게 '자네들도 어른이 되어 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여름방학 때 고려대 한맥 주최 수련회에 갔는데, 그날 나온 발언들이 하도 사회주의와 관련 있어 마치 간첩으로 포섭된 듯 싶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간 채만수가 "형, 앞으로 어디 가서 사랑론 좀 펴지 마세요"하고 쏘아붙였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사랑'이나 '행복'이란 말은 감상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말로 치부되어 기피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이 나빠"라고 말하고는 그냥 넘겼으나 나로서는 사랑이란 말을 기피할 수 없었?
후일 나는 사랑의 원리를 정리한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라는 책을 쓰기도 하고, 내가 하는 정치를 '사랑의 정치'라고 명명한 바도 있다. 운동권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랑을 강조했는데, 내 운동의 논리가 교조적인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지 않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뒤 운동권에 교조적 성격의 '사랑' 범람 현상이 나타나 격세지감을 느꼈다.
아무튼 나의 대학생활은 세상을 바꿀 힘을 결집하는 과정이었을 뿐 학과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세상을 바꾸는 일이 중요했더라도 학생이 공부는 않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만 전념한 것을 밝히려니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영구집권으로 나아가고 생존조차 어려운 서민대중의 신음소리가 들끓는 상황에서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학생운동의 정당성은 '순수'한 데 있다며 정치적인 학생운동은 '불순'한 것이라고 매도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지배의 논리요 기만의 언술일 뿐이다. 지금도 형태를 달리한 이런 논리가 판치고 있어 나라가 어렵다. '지배의 논리와 해방의 논리'란 책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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