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헌트 지음ㆍ전진성 옮김/돌베개 발행ㆍ320쪽ㆍ1만6,000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는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학교는 가르친다. 이른바 천부인권론이다. 하지만 저명한 문화사가인 린 헌트 UCLA 교수는 이 같은 상식을 거부하며, 인권은 발명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권의 발명가들은 누구인가? 바로 18세기 서한소설의 주인공들이다.
<인권의 발명> 은 인간의 평등이 18세기에 불현듯 자명한 진리로 옹립되는 배경과 역사를 추적한다. 이 시기는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 (1740)와 <클라리사> (1747~48),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 (1761) 같은 편지체의 서한소설이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때. 헌트 교수에 따르면, 서한소설의 작가 매개 없는 1인칭 고백체의 독특한 시점 형식은 불행에 처한 주인공들에게 자신의 고통과 슬픔, 절망을 직접적으로 토로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과의 '동일시'라는 새로운 감정적 폭발을 경험하도록 했다. 신> 클라리사> 파멜라> 인권의>
이 시기의 독자들은 귀족 부인의 몸종 파멜라가 고용주에게 당한 성적 유린을 전하는 편지를 읽으며 그녀의 고통에 몸을 떨었고, <신 엘로이즈> 의 쥘리가 죽어가는 모습에 고통과 환각, 경련과 오열을 체험했다. 화자와 인용부호의 간섭 없이 직접적으로 듣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비로소 학습하게 된 것이다. 신>
저자는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고, 이는 18세기 말 사법적 고문이 폐지되는 데도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찌르기, 다리 부러뜨리기, 달군 쇠로 지지기, 능지처참, 화형 등의 잔혹한 고문은 다른 사람의 열정, 감성, 동정심 역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공감의 확산으로 인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새로운 독서는 새로운 개인적 경험을 창출했고 그것은 다시 인권이라는 새로운 사회적ㆍ정치적 관념을 낳았다." 리처드슨과 루소의 소설이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이 등장한 프랑스 혁명(1789) 직전에 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공감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역사는 왜 18세기 후반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극까지의 시기를 공백으로 비워두었을까. 저자는 민족주의를 그 원인으로 지적하며 민족공동체 안에서의 인권이라는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의 포문을 열었다"고 말한다.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는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고 공포했다.
1948년 반포된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은 같은 문장에 인간(menㆍ남성)이라는 주어만 '모든 인간'으로 바꾸어놓았다. 인권의 역사엔 긴 공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백엔 인간, 즉 남성이라는 인권의 주체를 모든 인간으로 확대하기 위한 부단한 투쟁의 역사가 압축돼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말마따나 "인권은 아직도 집행하기보다는 지지하기가 더 쉬운 상태다." 유사 노예제가 여성과 아동, 소수자를 착취하고 있고, 경찰과 군대, 첩보기관의 밀실에선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인 처벌이 여전하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인권은 악에 대항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의를 겪을 때 당신은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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